스테이블코인이 향후 5년간 ‘슈퍼사이클’에 진입, 전 세계 결제 시스템을 급격히 재편할 수 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전망했다. 전 세계에 10만 개가 넘는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시스템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효율성과 비용 측면에서 기존 송금·결제 산업을 크게 흔들 수 있다. 하지만, 은행의 예금 기반과 신용 창출 기능에는 위협이 된다. 이에대한 대응으로 각국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은 ‘토큰화 예금’을 추진, 새로운 경쟁 구도가 전개되고 있다.
최근까지도, 돈의 세계는 명확했다. 미국 연준(Fed)이나 영국 중앙은행 같은 기관이 달러 지폐와 파운드화를 발행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물건을 사고팔았다.
하지만 일부 기술자들의 전망이 맞다면, 결제 기술의 최신 흐름인 스테이블코인이 이제 ‘슈퍼 사이클’에 진입할 가능성이 크다고 FT는 짚었다. 앞으로 5년 안에 전 세계에 10만 개가 넘는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시스템이 범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물 통화에 연동된 가상화폐인 이 코인들을 정산·관리하려면, 완전히 새로운 금융 인프라가 필요하다. 기존 금융권이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 관계자는 “이는 금융 시스템의 근본적인 재배치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여러 진보적 활용 사례를 지닌다. △통화 가치가 불안정한 국가에서는, 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이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결제 시스템이 느리거나 비효율적인 나라에서는, 훨씬 효율적인 결제 수단을 제공한다. △가상화폐를 거래하는 이들에게는, 다시 법정통화 금융 시스템으로 돌아오는 ‘출구’ 역할도 한다.
현 미국 행정부는 스테이블코인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미 국채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고, △달러 패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여러 면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비싼 해외 송금 서비스는 저렴한 경쟁자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높은 가맹점 수수료로 오랫동안 비판받아온 신용카드 회사들 역시 큰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는 역설적으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예금의 일부만 준비금으로 보유하고, 나머지를 대출로 운용하는 ‘부분 지급준비제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결제 기능은 제공한다. 하지만 신용 창출 기능은 없다. 스테이블코인이 만약 대규모로 은행 예금을 빨아들인다면, 은행의 자금 조달 기반이 약화된다. 실물 경제에 대한 신용 공급 능력은 위축될 수 있다.
중앙은행들, 특히 미국 밖의 중앙은행들은 이를 우려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통화 주권과 통화정책 통제력 상실을 걱정하며, 자체 디지털 화폐(CBDC)를 가능한 한 빠르게 도입하려 하고 있다.
상업은행들 역시 이들 신흥 세력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가 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핵심 예금 기반을 잠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 은행들은 반격에 나섰다. 스테이블코인처럼 블록체인을 분산 원장으로 활용해, 기존 은행 예금을 ‘예금 토큰(deposit token)’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로이즈은행의 찰리 넌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FT 뱅킹 서밋에서 “△디지털 자산과 △토큰화된 예금, 여기에 △AI를 결합하면 금융 서비스의 상당 부분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이즈은행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영국 중앙은행의 감독 아래, 주요 시중은행들이 참여하는 파일럿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상호운용성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
영란은행 부총재 사라 브리든은 ‘멀티 머니버스(multi-moneyverse)’에 대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영란은행은 지난달,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은행 예금에 대한 규제 체계 초안을 놓고 의견 수렴에 들어갔다.
토큰화된 예금을 활용한 거래는 글로벌 은행 산업에서 아직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실험을 선도하는 미국 최대 은행 제이피모건조차도, 토큰화 결제 규모는 하루 약 50억 달러(약 7조 3805억 원)다. 기존 결제 시장인 최대 15조 달러(약 2경 2141조 5000억 원)에 비하면 극히 적다. 그러나 개혁론자들은 상호운용성 문제가 해결되면, 은행들이 디지털 토큰의 효율성을 활용하면서도 스테이블코인과의 경쟁을 방어할 수 있다고 본다.
다국적 기업 고객의 경우, 은행을 통해 24시간 언제든 전 세계 계열사 간 자금을 이동시킬 수 있다. 시차나 중개은행의 필요도 없다. 또한, 은행 고객은 △자금세탁방지 규제, △최소 자본 요건, △투명한 보고 의무,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기능이라는 보호를 받는다.
은행 예금은 토큰화 여부와 관계없이 이자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미·유럽 법상 이자 지급이 허용되지 않는다.
토큰 기반 은행 시스템은 자산 거래를 지원하기 위한 자동 에스크로(조건부 예치) 기능도 제공할 수 있다. 또, ‘스마트 계약’을 통해 특정 조건에서 결제가 자동 실행되도록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소매금융보다는 도매금융에서 먼저 가시화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에스크로 기능이 주택담보대출과 주택 거래를 훨씬 매끄럽게 만들 수 있다고 넌 CEO는 본다.
모든 것은 아직 초기 단계다. 그러나 정책 당국이 현 금융 시스템의 기본 틀을 유지하더라도 △스테이블코인, 그리고 △토큰화된 은행 예금은, 금융의 디지털화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 변화에 저항하는 ‘러다이트’들에게 금융의 미래는 점점 더 가혹해질 것이라고 FT는 강조했다.
권세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