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와 평리 두 곳에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1955년 첫 삽을 뜬 지 42년 만이었다. 다시 27년이 흐른 지난달 29일 수부리 만수로에서 평리 큰길로 분기되는 지점에서 지역민이 뜻을 모아 저수지 건설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고 김장원 선생의 공로를 칭송하는 송덕비 건립 제막식이 열렸다.
유례없이 많은 눈이 내린 지난달 27과 28일 눈이 멎기를 간절히 비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막식을 준비하던 추진위원들과 비석 주인공의 후손들이었다. 특히 기획위원을 맡은 김완집 선생은 기상 이변에 대비하느라 애를 태웠다.
특히 이날 바쁜 틈을 내 축사까지 해준 김동일 보령시장은 과거 농업이 주된 사업이던 우리네 삶을 본인의 소년 시절 부모님을 도와 논에 물을 대던 추억을 더듬어 설명했다. 물이 부족할 때 생명과도 같은 물을 자기 논에 더 많이 대기 위해 밤샘도 마다하지 않았고 때로는 이웃과 다투기까지 했던 일을 되새기며 농업과 물의 중요성, 그리고 주민들 간의 화합에도 저수지가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또 추진을 총괄했던 김기홍 위원장은 천수답을 물이 콸콸 흐르는 옥답으로 만들어 기뻐하던 모습을 이야기해 줘 차가운 날씨에도 훈훈하게 가슴을 덥혀줬다.
수부저수지 제방 바로 아래 위치한 곳에 비석 설치를 추진한 김기홍 위원장을 포함한 12명의 위원들은 그때 미처 챙겨드리지 못한 선인들의 고마움에 보답하고 후세들에게 불망(不忘)의 교육을 시킨다는 뜻으로 평리 뒷산에서 생산된 남포(보령) 오석을 구해 공적을 돌에 새겨 세우게 됐다. 석각은 웅천읍 구장터에 있는 한국석각예술원 백영국 대표가 맡았고, 터는 웅천읍 수부리 오종민 씨가 자투리땅을 내줘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 옆에 세웠다.
거슬러 보면 그 당시 가뭄이 극심했는데 비가 와도 금방 휩쓸려 내려가고 물을 오래 담고 있을 그릇이 없어 하늘만 쳐다보며 농사지어야 했던 주민들에게는 저수지 공사가 꿈이요 희망이었다. 전쟁이 막 끝나 핍박한 국가나 지방 재정에서 저수지 구축을 위해 예산을 끌어온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주민들이 농촌 살림에 부담을 감당하기는 더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부저수지는 1955년 초기에 함께 사업 추진하던 분이 다른 일을 하게 돼 김장원 선생이 웅천수리조합장을 맡으면서 공사를 비교적 원만하게 진행해 도중에 3년의 중단을 거쳤지만 1965년에 완공했다. 공사 중단 기간에 공사 자재나 공구 등 물자가 손망실돼 추진 주관자인 김장원 선생이 재착공 전에 보상해주는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지금 같은 중장비도 없이 괭이와 삽과 망치, 그리고 인력만으로 그 정도 성과를 낸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한편, 평리저수지는 수부저수지 준공을 본 주민들이 서둘러 1967년 사업을 추진하다가 쉽게 승인이 나지 않자 전 웅천수리조합장 김장원 선생을 추대해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까지 뛰어 설명, 탄원. 진정하며 사업을 확정했고 예산까지 확보해 소류지 사업으로 승인을 받아 착공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968년 정부 시책의 변경으로 중단됐다. 이후 다시 착공했지만, 이번엔 기술 부족, 재원 부족 등으로 일부 공사가 부실해 누수되기도 했고, 때론 정부 방침이 담수를 목적으로 하는 저수지나 소류지보다는 관정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다고 사업 중지되는 등 사업이 안개 속에 빠졌다.
재원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주민 분담이 결정됐으나 주민 각자 부담은 불가능한 실정이어서 추진위원 2~3인이 개인 자산을 담보해 금융기관의 대출로 충당했다. 그러나 긴 휴지기간을 겪으며 다른 추진위원들이 대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자 김장원 선생이 담보의 책임을 홀로 떠맡았다.
사업이 기약 없이 지연돼 때로는 취로사업 형태로 바꿔 진행하기도 하며 세월은 자꾸 흘렀다. 목타게 기대했던 수리시설의 혜택을 주민들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일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분들의 고통은 형언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김장원 선생은 이로 인해 가세가 기울고 건강을 잃어 1979년 타계했다.
농지개량조합(현 농어촌공사)의 지도와 협조를 받아 농지개량사업 또는 경지정리 사업 등으로 사업 형태를 바꿔 가며 공사 중지와 재착공을 반복하다 농개공에 이관하고 우여곡절 끝에 1992년에야 평리저수지 사업으로 본격적으로 새로 원점 착공 6년인 1997년에야 사업 시작 30년 만에 준공할 수 있었다.
평리저수지는 초기 사업 추진(준비) 1단계와 소류지 사업을 확정해 기초공사를 시공한 2단계, 그리고 사업 형태 변경 등으로 관 주도 저수지 사업으로 마무리했던 3단계로 나눠 볼 수 있다.
김장원 선생은 1907년에 출생해 웅천초등학교 전신인 화정 공립보통학교 4회(4년)와 6회(추가 2년)로 마쳤다. 동기생들로는 상급 학교에 진학해 웅천초등학교 교장, 웅천면장이 된 김정철, 김덕원 님 등 여러분이 있다. 선생은 웅천읍 평리 양촌에 터를 잡아 농사지으며 근면과 성실로 이웃과 화합했고 형제같이 도움받고 도와주며 오랜 기간 이장을 맡아 민·관 간의 교량 역할로 봉사했다.
슬하에 4형제를 둬 모두 웅천초등학교 또는 수부초등학교를 거쳤고 웅천중학교를 다녔다. 첫째는 대천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한 김효기이고 둘째는 한국전력공사의 정보통신 분야에 봉직한 김창기이며, 셋째는 고향에서 대천고등학교를 마치고 사업에 투신해 농산물 전문 무역업을 하고 있는 김성환이고, 넷째는 웅천중을 거쳐 서울대 문학박사에 교수까지 역임한 김창환이다.
선생은 또 1940년대 말 웅천읍 구장터길에 위치한 웅천국민학교까지 약 5km 되는 먼 거리에 통학하는 평리 수부리 성동리 학동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려고 뜻을 같이하는 유지들과 협의해 땅을 제공하신 분 등과 기성회를 조성해 웅천초등학교 수부분교를 설립했고 이후 더욱 힘써 1957년에 수부국민학교로 승격시키는 일도 했다.
김기춘 추진위원은 주민 대표 축사에서 수부초등학교가 역사도 길지 않고 규모도 작지만, 국회의원, 장관, 도지사를 비롯해 여러 방면에 훌륭한 인사를 많이 배출했다고 자랑했다. 후손들로서는 추진위원들께서 이번 비석을 세우는 일에 크게 마음을 써 줘 고맙다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고향을 떠나 오랜 세월 자주 들리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고 죄송해 몸 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비석이 서 있는 바로 뒤편이 수부저수지이고 그 뒤를 받쳐 주는 성주산과 옥마산에 유서 깊은 성주사와 단원사가 있다. 바로 그곳에 보령시가 마련한 모란공원이 있고 부모님 유택이 거기 있으니 앞으로 부모님 산소도 비석도 더 자주 살펴볼 수 있게 됐다고 은근히 기뻐했다. 특히 성주사는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양국하고 내려와 거주했던 연유로 조상들이 여기 보령에 뿌리를 내렸던 사연이 있는 곳이어서 더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자연히 동리 주민들과 호흡을 같이 할 기회도 잦아지리라는 기대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했다. 고향은 한동안 떠나 있어도 마음은 늘 그곳을 잊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전에는 다른 지역보다 교통도 불편하고 조금은 낙후된 지역이었으나 요즘 들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야 서해안 시대가 보령에서 꽃을 피우는가 생각된다.
특히 내포 신도시가 옛 지명 유래에 따라 재현됨에 따라 홍성에서 북쪽으로 화성 지역을 거쳐 일산까지 서해선 전철이 구간 구간 개통되고 있다. 동쪽으로는 대전 방향은 물론 충북 지역까지 고속도로가 하루하루 다르게 하나씩 연결되고 있다. 세종시, 충주시 등을 포함하는 메가시티 구상도 충남 주도하에 착착 합의되고 있는 등 고향 출신들이 이 고장을 지키며 고향을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쏟고 있는지 칭찬이 절로 나온다.
보령 문인인 최관수 님은 ‘道法自然의 實顯’이라는 헌시를 지어 바치며 낭송했는데, 옛글에 나오는 ‘上善若水’를 비유로 들어 물의 중요성을 시로 읊었다. 택리지를 지은 이지함 선생이 말씀하길 내포 보령 지역은 사람이 살기에 참으로 좋은 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진작가이신 박용서 님은 날씨가 궂고 장소까지 초엽해 많은 사람이 도열하기도 어렵고 일목요연하게 사진을 찍을 수도 없는 여건인데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보겠다고 애를 써 주었다.
한편, 제막식의 사회를 맡았던 김찬집 백제문화연구회 회장은 처음부터 시간을 축소해 30분에 맞추라는 주최 측 요구에 불만이 많았으나 식이 막 끝나려는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결국 비가 그칠 것을 예견했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비에 준비된 식사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바로 떠나는 분들도 있었기에 주최 측에서는 아쉬움이 많았다. 박용서 작가님은 그룹별 사진도 제대로 못 찍었다고 불편한 기색이었으나 어떤 분들은 “비와 저수지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 궁합인가”라고 웃어넘기기도 하며 70여 년의 긴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아쉬움 속에 식을 마무리했다.
◇ 기사제공=김창기 유족대표
◇ 사진제공=박용서 보령국가유산지킴이봉사단 부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