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사태 해결한 100년 로펌도, ‘인재이탈’ 한번에 문닫아

이코노미스트, “투자은행·컨설팅펌 등은 ‘공유할 철학’ 없으면 언제든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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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초대형 로펌 와일 고샬 앤 맨지스(Weil, Gotshal & Manges)가 스타급 인재들의 연쇄 이탈로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이 로펌은 월스트리트와 법률업계에서 엔론, 리먼브러더스 사태 등의 해결사로 약 100년간 명성을 쌓아왔다. 이런 거대로펌조차, 핵심 인재를 붙잡지 못해 무너지는 이례적인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과거 글로벌 로펌과 투자은행(IB), 컨설팅사 등에서는, 개인이 조직에 기여하는 대신 높은 보수와 안정적인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이들 회사의 경쟁력이 소속 조직의 브랜드와 시스템에서 개인의 능력과 시장가치로 이동하고 있다. 이들 회사와 그 구성원 사이의 장기적인 충성심과 공동체 의식은 붕괴하고 있다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등이 최근 보도했다.

이 때문에, 이들 회사의 ‘기업문화’가 마지막 경쟁력이 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리콘밸리의 일부 인공지능(AI) 연구소가 치열한 인재 확보 경쟁 속에서도 집단주의적 조직문화를 유지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기술의 위험성과 인류에 대한 책임이라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직을 묶는 힘은 공동의 미션과 문화가 될 수 있다. 높은 보수와 법적 계약만이 아니라, △기업의 미션, △가치관, △동료와의 신뢰, △장기적인 공동 목표가 조직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국의 이들 회사에서도 우수 인력을 채용하는 것만큼이나, 해당 인력을 장기간 조직에 남게 하는 전략이 중요해지고 있다.

미국 로펌 와일은 지난달 28일 경영위원회가 파트너들에게 “회사의 질서 있는 사업 종료”를 권고했다고 밝혔다. 1931년 설립된 이 회사는 약 1200명의 변호사를 보유한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 로펌이다. 엔론과 리먼브러더스, 제너럴모터스 등 대기업의 파산·구조조정 사건을 자문하며 명성을 쌓았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와일은 2025년 약 21억 달러(2조 8217억 7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파트너 1인당 평균 이익도 약 560만 달러(약 75억 2584만 원)에 달했다. 금융부채가 없는 상태였지만, 핵심 인력의 이탈, 경영권 승계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조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회사는 사업 정리를 위해 구조조정 자문사 알릭스파트너스(AlixPartners)를 영입했다.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기업법무 부문을 이끌던 마이클 아이엘로가 경쟁 로펌 크래버스 스웨인 앤 무어(Cravath, Swaine & Moore)로 옮긴 것이다. 다른 파트너들도 그와 함께 이동했다. 이후 경쟁 로펌들이 와일의 변호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뉴욕 맨해튼의 제너럴모터스빌딩 앞에 줄지어 몰려들었다. 와일은 이 건물에 본사를 두고 있다.

사모펀드 분야의 주요 인력들도 폴 와이스(Paul, Weiss) 등 경쟁사로 떠났다. 차기 최고 파트너로 예정됐던 라모나 니마 취임을 포기하면서 경영권 승계에도 차질이 생겼다. 윌키 파 앤 갤러거(Willkie Farr & Gallagher)와 추진하던 합병 협상도 결국 결렬됐다. 거의 한 세기 동안 미국 기업계의 정점에 군림해 온 이 기관은 한 순간에 사실상 종말을 맞게 됐다. 

로펌 와일은 그야말로 은행에서 예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뱅크런(bank run)’에 비유할 만한 사태를 겪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평가했다. 파산 사건 자문으로 유명한 와일은 이제는 스스로 파산 전문 변호사들을 고용해 회사의 사업을 정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펌의 대차대조표는 단순하다. 사무실 의자와 변호사들의 두뇌를 합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두뇌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나기 시작하면 종말이 멀지 않은 것이다.

“로펌의 수익성이 아닌, 스타 변호사의 몸값이 문제”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로펌이 무너진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예일대의 존 몰리 교수가 지적했듯이, 파트너십 형태의 조직에서는 조직이 순식간에 와해될 수 있다. 부실한 회사의 파트너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손실을 떠안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와일처럼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로펌이 이토록 짧은 시간에 심각한 위기에 빠진 사례는 없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평가했다.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더라도 와일은 대단히 성공적인 기업이다. 이 회사 파트너들은 평균적으로 연간 약 600만 달러(80억 6340만 원)를 벌어들인다.

와일 변호사들이 고객으로부터 막대한 수임료를 받아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새롭게 등장한 문제가 있다. 최고 수준의 스타 변호사들이 이제 자신이 소속된 로펌으로부터도 엄청난 보수를 요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회사를 떠날 때 조직에 입히는 피해도 커지고 있다.

이처럼 전문직 종사자들이 자유롭게 직장을 옮기는 현상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는 단순히 한 로펌의 몰락을 넘어 훨씬 더 중요한 변화가 끝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20세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엘리트 집단의 안정성”
20세기 들어 대규모 정리해고가 일상화되면서, 일반 근로자와 기업 사이의 호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유대관계는 끊어졌다. 그럼에도 서구 자본주의에서 경쟁을 이겨낸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여전히, 중세 길드와 비슷한 조직 안에서 평생 경력을 쌓는 것이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보고 있다.

IB나 컨설팅회사, 로펌에서 파트너가 되는 것은 가장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직업적 선택이었다. 시장 경쟁에서 성공하면 구성원은 오히려 시장의 압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전문직 종사자들은 직업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이들은 유명 사교클럽이나 각종 기업 이사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 인근의 고급 협동조합형 아파트에 거주할 기회도 원한다면 얻을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 승리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시장의 변덕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공동체의 일원이 됐다는 것이다.

“엘리트 공동체는 무너지고, 개인의 시대 열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이러한 엘리트 집단주의가 거의 사라졌다. 가장 먼저 이 흐름에서 벗어난 것은 투자은행가들이었다.

1999년 월스트리트의 전형적인 파트너십 조직이었던 골드만삭스는 경쟁사들의 뒤를 따라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경영진을 여전히 ‘파트너’라고 부르지만, 과거와 같은 의미의 파트너는 더 이상 아니다.

옛 파트너십을 재현하려 했던 소규모 M&A 자문회사들도 대부분 주식을 상장했다. 창업자들이 자신이 보유한 지분을 현금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법조계의 집단주의적 성향은 이보다 훨씬 오랫동안 유지됐다. 로펌은 사업 확장을 위해 외부 자본을 조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법조계에도 시장의 압력이 밀려왔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짚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변호사의 보수를 결정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과거에는 입사 연차와 근속 기간에 따라 보수가 결정되는 ‘록스텝(lockstep)’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과와 시장에서의 몸값에 따라 보수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고의 변호사들은 자신이 원하는 보수를 직접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소속 로펌을 훨씬 쉽게 옮길 수도 있게 됐다. 답답하지만 안정적인 협동조합과 비슷했던 로펌의 지배구조는, 효율적이지만 비인격적인 콘도미니엄과 유사한 형태로 바뀌었다. 

과거에는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조직을 함께 운영했다. 이제는 각자가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독립적인 개인에 가까워졌다.

“와일의 몰락은 다른 로펌에도 닥칠 수 있어”
와일은 엘리트 집단주의의 종말을 경험한 첫 번째 대형 로펌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평가했다. 그러나 마지막 대형로펌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와일이 무엇을 달리했어야 했는지, 또 무엇 때문에 특별히 몰락의 표적이 됐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법조계 전체를 불안하게 만든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로펌들이 언제든 핵심 변호사 한 명의 이탈로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산업이 됐기 때문이다.

한때 안정성을 보장했던 파트너십 구조가 이제는 오히려 조직의 약점이 됐다. 핵심 변호사가 고객으로부터 벌어들이는 수임료만큼의 보수를 받지 못한다면, 그에게 조직에 남아 동료들과 협력할 유인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돈을 주는 경쟁사로 떠날 이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로펌 건물 입구에 새겨진 이름들은 더 이상 구성원들이 가치를 공유한다는 증거가 아니다. 점점 더 효율적으로 변하는 기업 지배구조에서, 전통과 품격을 보여주는 장식물에 가까워졌다. 충성심은 별다른 의미가 없어졌다. 역사와 전통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로펌의 미래는 헤지펀드의 모습과 닮아갈 것”
법조계의 이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로펌은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 변호사들은 다른 산업에서 이미 나타난 변화를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엘리트 공동체가 엘리트 개인으로 대체된 산업들이라는 것이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이다.

최고의 인재와 2등 인재 사이의 가치 차이가 매우 큰 분야라면, 어디에서나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축구선수부터 프로그래머, 래퍼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타델(Citadel)이나 밀레니엄(Millennium) 같은 헤지펀드다. 이곳의 포트폴리오 매니저들은 서로에게 특별한 의무를 지지 않는다.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오히려 서로 경쟁하는 경우도 많다.

각자는 자신이 창출한 수익 중 얼마를 보상받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손실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해고될지도 대략 알고 있다.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런 트레이더들은 본질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긱 워커(gig worker), 즉 프로젝트나 성과 단위로 일하는 독립 노동자들이다.

“기업들은 어떻게 인재 이탈을 막을까”
와일이 끝났다고, 모든 것이 잘 끝난 것은 아니다. 기업 가치의 대부분을 스타급 인재라는 인적 자본에 의존하는 회사라면, 와일의 몰락을 보면서 스타 인재의 이탈에 대한 심각한 불안감을 느껴야 한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주장했다. 그렇다면 조직의 질서를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을까? 

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금융업계에서는 직원들이 경쟁사로 옮기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경업금지 약정을 체결한다. 경우에 따라, 퇴사 후 수년 동안 경쟁업체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제한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이런 약정은 로펌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불법적인 방법도 있다. 마피아 조직을 떠나면 손가락을 잘릴 수도 있는 것처럼.

그러나 가장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유대관계는 문화에서 나온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역설했다. 과거 월스트리트에서는 유대계와 개신교계 금융회사 사이의 구분이 그러한 문화적 결속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이와 유사한 결속을 무엇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실리콘밸리에 그 해답이 있을까”
실리콘밸리에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있다. 다만 다른 산업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최고의 AI 연구자를 영입하기 위한 경쟁은 스타 인재 확보 전쟁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기업들은 경쟁사로부터 최고 연구자를 빼내기 위해 끊임없이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 엘리트 기업 가운데 과거에 지배적이었던 집단주의적 성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곳은 최첨단 AI 연구소 정도다. 그 배경에는 자신들이 개발하는 기술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에 관한 서로 다른 신념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AI 기술의 위험성과 인류에 미칠 영향에 대한 공통된 문제의식이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반면, 월스트리트에는 이처럼 조직 구성원들을 하나로 결속시킬 만한 실존적 철학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철학의 부재가 월스트리트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실존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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