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과 나는 전란으로 가족과 헤어져 아버님은 북에 두고 온 가족 만나기를 애타게 그리셨지만 이루지 못했고, 난 십여 살 나이에 어머니와 헤어져 52년 만에 만났지만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눈물로 쓴 편지 한 장만 보내드렸습니다. 나는 흩어진 가족들의 애절한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족 찾는 일에 애써 보기도 했습니다.”
이산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30년 넘게 북측과 대화를 하면서도 정작 본인의 어머니는 만나지 못했다. 만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안 만났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로서 먼저 가족을 찾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병웅 전 수석대표가 어머니께 드린 평생 한 번 쓴 편지와 외국 제자들이 보내온 글, 남북관계를 위해 일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30여 년의 남북대화 뒷이야기를 수록한 책을 냈다.
최근 북핵문제를 놓고 북·미 정상회담 합의가 결렬되는 등 치열한 신경전이 오가는 상황에서 30여 년간 남북대화의 주역이었던 선생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산가족인 그의 자서전은 한 사람의 드라마 같은 삶을 넘어 대한민국의 역사의 한 페이지이기도 하다.
천신만고 끝에 흥남 부두에 왔으나 이미 주변은 중공군에 포위되었고 앞은 바다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쪽배라도 구하려고 수소문했으나 이미 떠날 수 있는 배는 다 떠났다. 수많은 피난민들은 우왕좌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고향의 한 교회에서 그 곳에 함께 온 분들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져 당초 계획이 없었던 미군 배편이 마련되어 승선의 기회가 주어졌다.
부두는 몇 척 안 되는 배를 타기 위해 밀치고, 넘어지고 아이들을 잃어버려 찾는 이들로 말할 수 없는 혼란의 현장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놓치지 않도록 허리띠에 끈을 묶어 연결하여 이리저리 승선할 기회를 엿보며 다녔다.
그러나 11살에 어머니와 헤어져 이산가족이 되었다. 북에서 피난할 때 아버지는 왕진가방 하나만 들고 나왔다. 막일을 해보시기 않으셨던 분이라 당장 하실 일을 구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할 수 없이 스스로 피난 나온 형들을 따라 생업의 현장에서 잠깐 일했다. 좀 힘들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미군 군화를 닦는 일로 웬 신발이 그리도 큰지 광을 내려면 온 힘을 다해야 했고 상점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곤 했다.
2001년 총재특보로 다시 이산가족 문제를 맡게 되어 금강산 상봉행사에 다니게 되었다. 2002년 9월 행사에 북의 백문길이 꿈에도 그리던 어머님을 모시고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땅에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가족의 생사라도 알려달라고 수시로 찾아오는 상황에서 공적 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적인 일을 앞세울 수 없어 어머님이 계신 장소로 가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죽은 줄로 알고 50여 년간 제사를 지내온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에 위로가 되며 공인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하신 어머님의 따뜻한 전언의 말씀을 들었다.
1971년 9월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이 시작되면서 처음 북측은 매우 공격적인 자세로 회담에 임했으며 우리 측은 매우 수세적인 입장이었다. 북측은 이산가족을 찾기 위하여서는 누구든지 자기 고향에 가서 자유롭게 다니면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우리 측은 우선 적십자사에서 생사를 확인해 준 다음 가족끼리 만나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듣기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찾는다는 주장이 훨씬 적극적인 방법인 것 같지만 북측은 순수한 뜻이 아닌 복합적인 의도를 가지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 회담 분위기로서는 우리 측의 주장이 소극적이고 북측의 주장이 적극적이었으므로 우리는 방어적인 설명을 계속해야 하는 처지였다.
우리 일행은 잠시 휴식 후 소년극장에서 소년들이 준비한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급한 소식이 서울 상황실에서 전해져 왔다. 남북합의에 의하여 대표단이 장시간 머무는 곳에는 반드시 직통전화가 연결되도록 되어 있어 긴급연락을 보내 온 것이었다. 내용은 지금 대표단이 목에 매고 있는 머플러를 빨리 풀어 버리라는 전달사항이었다. 왜 풀어야 하나? 아무 의미 없이 환영의 뜻으로 매고 다녔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북측에서 주장하는 환경조건론은 남북관계가 잘 진행되고 있을 때에는 몇 번 발언만 하고 이 이야기를 더 거론하지 않아 합의서를 이루고, 사업이 실천되지만 북측이 환경조건론을 계속 강력하게 주장하는 경우 그 회담은 결렬되고 만다.
1994년 6월 17일 방북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 평양회담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용의를 표명하여 다음날 김영삼 대통령이 이를 수락함으로서 다섯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 절차회의를 갖고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동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회담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후 북측은 남측 정부가 조문사절단의 방북을 허용하지 않음에 대하여 “상식 이하의 무례한 처사”라고 비난하고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하였다.
현시점에서 핵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어 북미관계가 조율되어 핵이 폐기된다고 하더라도 북의 기본 체제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남북의 조기 통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남북 모두가 평안히 살 수 있는 사회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남과 북은 오랜 시간을 두고 사회적 변화를 이룬 후에야 평화로운 통일국가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 이병웅
1940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출생했다. 경희대법대, 고려대경영대학원을 졸업하였고 단국대행정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총회신학교(백석), 이르쿠주립대사회학에서 명예박사를 수여받았다. 1964년 정훈학교 교관을 거쳐 월남전에 참전했으며 대위로 예편하였다. 1969년 국정원북한사회기획관,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운영부차장(7.4협상참여), 1982년 대한적십자사총무·기획관리국, 1985년 남북적십자회담대표, 1992년 대한적십자사사무총장·총재특보, 1992~2004년 남북적십자회담수석대표, 1998년 한서대 교수와 국제인도주의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이외에도 KBS사회방송자문위원, 민주평통상임위원, 청협·재협·사회복지협 이사, 국무총리실안전위원, 통일부남북회담자문위원장, 남서울교회장로, 남북이산가족협회장, 남북의료재단공동의장, 서울적십자부회장, 서울적십자청소년위원장, 대한적십자사중앙위원, 민족화회협공동의장 등의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정부훈장, 국민포장, 대통령표창, 적십자광무장 등을 수상했다.
오창규 기자 chang@data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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