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에서 부장 타이틀을 단 날
그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학비도 물가도 많이 올랐어 더 좀 보내줘.
그는 승진했다는 말을 못했다.
명퇴명단이 발표됐고 그는 약간의 목돈을 생각하며 한 뼘 파라솔 밑에서 켄맥주로 허기를 달랬다.
결국 이렇게 부서지는 구나. 켄맥주 알루미늄 껍데기가 뿌지직 찌르러졌다.
아내는 딸과 함께 미국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켄맥주를 마시며)
“나뭇잎들 후드득 설레는 아침
비가 내리네
세상이 적마하고 촉촉하니
나도 비가 되어
그대의 뒤뜰에 내리고 싶네
내가 빗방울이라면 이미
그대 가슴속에 젖었을 것을
내가 물감이었다면 이미
그대 마음속 벌겋게 물들었을 것을
가을비 내리는 아침
세상은 그저 아득하고
그대는 아직 고요하기만 하네”(가을비)
시인이면서 증권맨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는 이희주 시인의 두번째 시집『내가 너에게 있는 이유』가 <시인동네 시인선> 시리즈 222번째로 출간됐다. 그는 1989년 『문학과 비평』가을호에 시 16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이번 시집에서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외롭고 쓸쓸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잔잔하면서도 애잔하게 그리고 있다.
이 시집에 대해 문학평론가 임지훈은 <시해설>을 통해 “『내가 너에게 있는 이유』는 쓸쓸한 도시의 밤을 수놓는 수많은 불빛과 반짝이는 술잔들을 닮아 있다”면서 “세상에 삿된 깨달음을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다만, 그와 같이 스스로 번민하고 고뇌하며 함께 슬퍼하는 사람은 드물고 귀할 따름”이라고 평했다.
1962년 충남 보령 출생으로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이희주 시인은 사실 시인보다는 증권맨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89년 한국투자증권의 전신인 한국투자신탁에 입사했다. 한국투자증권 전무로 2022년 퇴사하기까지 영업점, 경제연구실, 마케팅부, 홍보실 등을 두루 거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인으로서의 활동도 계속했다. 현대문학, 작가세계, 현대시사상 등 시 전문지에 꾸준히 시를 발표하며 1996년 출판사 고려원에서 첫번째 시집 『저녁 바다로 멀어지다』를 상재했다. 2010년에는 한국시인협회 감사직을 겸하며 시단의 실무에도 참여했다.
이희주 시인은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언어가 존재의 집이 듯 언어를 다루는 시인은 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당신은 그저 그러한 ‘존재자’가 아니라 고귀한 ‘존재’ 그 자체임을 일깨워주는 사람들”이라며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바로 이번 시집”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오창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