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가상자산 등 혁신경제 특화 인터넷은행 ‘에레보르’ 인가

FT, “제2의 실리콘밸리뱅크 지향…앤두릴·팔란티어 창업자가 공동설립, 피터 틸이 투자”

가상자산 등 혁신경제(innovation economy)에 특화된 인터넷은행 ‘에레보르(Erebor)’가 미국에서 올해 연말까지 출범한다. 이 은행은 인공지능(AI), 방위산업, 첨단제조업 등 기술 중심 산업과 해당 산업 종사자, 그리고 투자자 개인도 주요 고객으로 삼을 예정이라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이번 인가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탈중앙화금융(DeFi), 그리고 은행을 위시한 전통 금융(TradFi)의 양자가 본격적으로 융합되는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있다.

FT에 따르면, 미국 금융규제당국이 신생 에레보르은행의 출범을 최근 인가했다. 이 은행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억만장자 기술기업가들이 설립했다. 이 은행의 목표는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 붕괴로 생긴 공백을 메우겠다는 것. SVB는 파산 전까지, 미국 내 벤처투자 기반 기술 및 생명과학 기업의 절반 이상을 고객으로 두고 있었다.

가상자산 업계에선 에레보르은행 출범에 대해, 기관 투자자와 신생 기업들에게 새로운 자금 통로를 제공할 수 있다는 기대 섞인 반응이 나온다. 스타트업이 본격적인 성장 단계에 진입하려면 기존 금융시스템으로부터 충분한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지만, SVB 붕괴 이후 이 같은 경로가 거의 사라졌다.

에레보르은행은 방산기술 기업 앤두릴의 공동 창업자인 팔머 러키, 그리고 벤처캐피털 에이트브이씨의 대표이자 데이터 분석기업 팔란티어 공동창업자인 조 론스데일이 올해 공동 설립했다. 주요 투자자에는 피터 틸의 파운더스 펀드와 가상자산 투자사 혼 벤처스도 포함돼 있다.

‘에레보르’라는 이름은 앤두릴과 팔란티어와 마찬가지로, 톨킨의 판타지 세계에서 따왔다. 이는 ‘외로운 산(The Lonely Mountain)’의 이름으로, 소설 ‘호빗’에 등장하는 용 스마우그(Smaug)로부터 보물을 되찾은 곳이다. 에레보르은행 관계자는 “우리는 위험을 무리하게 떠안지 않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은행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번 인가는 ‘예비 및 조건부(preliminary and conditional)’ 승인으로, 에레보르은행은 2025년 정식 영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규제당국의 승인은 지난 6월 신청 후 불과 4개월 만에 나왔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디지털 자산 중심의 새로운 은행 설립을 촉진하고, 금융 규제를 완화하려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FT는 해석했다. 이 은행은 정식 개업 전까지, 보안·준법 시스템 점검 등 여러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공동설립자인 팔머 러키와 조 론스데일은 2024년 대선 당시 트럼프 캠프의 주요 후원자였다. 피터 틸은 부통령인 제이디 밴스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지난 8월 보도에서, 에레보르의 투자 유치 문건에 “팔머의 정치적 네트워크 덕분에 은행 승인이 2025년 말까지 완료될 것”이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전한 바 있다. 그러나 회사 측은 이 문건이 “비공식적이며, 승인되지 않은 문서”라고 해명했다.

법률 자문을 맡았던 스캐든의 애덤 코헨 변호사는 최근 미국 통화감독청(OCC·Office of the Comptroller of the Currency)으로 이직했다. OCC 청장 조너선 굴드의 수석 법률 고문으로 그는 임명됐다. 굴드는 성명에서 “에레보르는 내가 OCC에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예비 인가를 받은 은행”이라며 “디지털 자산 관련 은행에 무조건적인 장벽을 두지 않겠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에레보르는 2억7500만 달러(약 3943억 7750만 원)의 자본으로 설립됐다. 현재까지의 운영 자금은 전적으로 팔머 러키 개인이 부담하고 있다. 은행은 향후 추가 자금 조달을 계획 중이라고 FT는 설명했다. 이 은행의 본사는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보조 사무소는 뉴욕에 두며, 디지털 전용 서비스(스마트폰 앱·웹사이트)로만 영업한다.

창업자들은 SVB 붕괴 이후 새로운 기술 중심 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러키의 방산 스타트업 앤두릴도 과거 주거래 은행이 SVB였다.

에레보르은행은 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 관련 서비스를 핵심 사업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과거 바이든 행정부가 도입했던 스테이블코인 제한 규제를 되돌리는 정책을 펴고 있다. 에레보르 관계자는 “우리가 인가를 이렇게 빨리 받은 건,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업계획 덕분”이라며 “우리는 ‘괴짜 가상자산 은행’이 아니라 전통적 금융 원칙을 지키는 은행”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의 민주당 간사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은 “이번 승인은 납세자 부담의 또 다른 구제금융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시도”라며 “자유시장에서는 생산성이 높은 기업에 자금이 흘러야지, 대통령 측근의 정치적 인맥을 따라 흘러선 안된다”고 비판했다.

에레보르은행은 오웬 라포포트 디지털자산 소프트웨어 ‘애어 컴플라이언스’ 공동창업자에게 최고경영자(CEO)를 맡겼다. 제이콥 허시먼 전 크립토 기업 ‘서클’ 고문을 최고전략책임자로 두고 있다. 마이크 헤이거던 전 뉴저지 밸리내셔널은행 부사장이 행장을 맡는다. 러키와 론스데일은 일상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FT는 밝혔다.

권세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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