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규 칼럼] 어처구니 없는 속국 논쟁

오창규 데이터뉴스 대표

"제가 1월 초 미국의 국가정보국(DNI)과 국방·안보 관련 학자들을 만나 '중국이 왜 저렇게 나오느냐, 당신들이 말려라. 당신들 무기를 갖다놓는데 우리가 고생해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미국 측에서) '중국이 설명을 들으려고 하질 않는다'고 하더라. 결국은 자기들이 많이 컸다는 생각이다. 한국이 100년 전에 속국이었는데 일본 때문에 속국을 벗어났다 하는 것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의 20일 전체회의에서 자유한국당 이철우 의원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와 관련, 미국 정보기관에서 들은 얘기라며 이같이 전했다. 더 가관인 것은 이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우리끼리 속국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실이다.

한심한 자화상이다. 참회의 징비록을 논해도 부족한 데 사색당파같은 논쟁을 하고 있다니 입맛이 개운치 않다.

따라서 조선의 당파싸움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일로 날밤을 새웠는 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 내내 집권당의 지위를 차지했던 것은 광해군 15(1623)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서인이다. 서인은 쿠데타를 통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집권당세력인 북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에 대한 세간의 민심이 안좋자 동인의 또 다른 축인 남인들을 체제 내 야당으로 남겨뒀다. 체제 내 야당이었던 남인들이 예송(禮訟) 논쟁을 계기로 정국의 주체로 나섰다.

예송 논쟁은 두 차례 전개되었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孝宗·재위 1649~1659)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일이다. 생존해 있던 인조(仁祖·효종의 아버지)의 계비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를 놓고 주도권 싸움을 했다.

2차 예송논쟁은 15년 후인 현종 15(1674), 효종의 부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다. 이 때도 시어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논쟁의 날밤을 세웠다.

한심한 일이다. 더큰 슬픔은 병자호란(1636)을 겪은 지 불과 얼마 되지않은 때라는 사실이다. 병자호란은 국제정세를 읽지못하는 지도자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됐다. 4색당파 싸움에 매몰된 지도부는 청()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애써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국가가 초토화되고, 결국 젊은 남여 60만명이 노예로 끌려가는 비극을 맞이했다.

이미 바로 전 1592년 임진왜란 7년 전쟁으로 인구 1200만명 중 절반이 죽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 언제나 유성룡 선생의 발등에 못을 박는 심정으로 기록한 참회의 징비록(懲毖錄)’은 장식용 책이었다.

중국지도부와 중국인들이 한국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생각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남을 깔보는 민족주의는 쉽사리 옅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의 뿌리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로 정권의 정통성을 찾은 조선 이성계정권에 있다. ‘억불(抑佛)’, ‘억상(抑商)’, ‘숭유(崇儒)’를 근간으로 한 조선의 정강정책은 논쟁만 즐길 뿐 연약한 나라가 됐다. 특히 억상정책으로 가난한 국가로 전락했고, 숭유정책으로 만 따지며, 스스로 명나라의 속국을 자처하는 국가가 됐다.

삼강오륜은 허울만 좋은 중국의 정치철학임에도 신주단지로 모셨다. 삼강오륜은 원래 중국 전한(前漢) 때의 거유(巨儒)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됐다.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공자는 주()의 문왕 무왕, 주공을 이상적인 성인으로 칭송했다. 조금 뒤에 태어난 묵자는 한발 더 나아가 세상을 구한 하()의 우왕(禹王)을 이상향으로 노래했다.

맹자는 두발 더 나아가 전설과 같은 요 순 시대의 도를 끌어들였다. 즉 요는 순에게 왕위를 양도했고, 순은 우에게 양도했다는 식으로 포장했다. 왕위 세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설의 고향과 같은 모호한 역사까지 끌어들여 정치철학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처럼 이를 사대주의 포장지로까지 감싸 금과옥조로 모셨다. 속국 논쟁도 그 후유증이다. 오늘날까지 중국인들이 우리를 자신의 속국으로 생각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삼강오륜의 탄생 배경뿐만아니라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고구려 등 먼 역사를 논할 필요도 없다. 중국을 마지막으로 통일한 청태조(누르하치)는 신라의 후손이고, 여진족이 우리 동이족이고, 고구려의 후예다. 심양 서탑의 북릉공원에 가면 그의 아들 청태종의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는 애신각라 황태극(愛新覺羅 皇太極)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말라’.

청태조은 신라 출신 김함보의 후손으로 경순왕의 사위이면서 안동권씨의 시조가 된 김행(金幸)의 세 아들 중 한명이라고 한다. 그는 마의태자와 함께 신라 부흥운동을 펼치다 마의태자가 숨지자 만주로 가 여진족의 일부인 완안 부족의 추장이 됐고, 누르아치는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려사에 나온 기록이다.

중국 색으로 알려진 붉은 색 역시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부터 생긴 풍습이다. 중국은 본래 황색을 숭상하는 민족이다. 붉은 색은 우리 동이족의 상징색이다. 더구나 신채호 선생은 중국 이름의 기원은 고구려라고 했다. 가우리(가운데의 고어)고리 고구리고구려중국(中國)이 라는 것이다. 누가 누구의 속국이란 말인가.

정체성은 당당한 국가의 원천이다. 역사를 모르면 졸장부의 나라가 된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드 논쟁을 보면서 느낀 회한이다

오창규 데이터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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