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연초, 신년특집으로 90살의 최태영 선생을 인천 사무실에서 인터뷰했다. 90세 나이에도 바른 자세로 앉아 영어로 쓴 ‘한국 상고사’ 초본에 오탈자를 수정하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영어로 쓴 이유를 묻자 미국 알레스카 대학원에서 자신이 한국고대사를 쓰는 것을 어떻게 알고, 대학원 교재로 쓰려고 하니 영어로 먼저 편찬해달라고 해서 그랬노라고 했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영국법학을 공부한 그는 77살이 되면서 역사공부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무려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6시 반까지 7시간 흐트러짐 없이 열변을 토했다.
“이병도와 저는 친구다. 그에게 역사공부를 권유한 것도, 고등고시에 역사과목을 넣게 한 것도 나다. 결과적으로 죄를 많이 진 셈이다. 77살 되던 해 사법고시 역사시험 문제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런데 고려 이전의 역사가 제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친구인 이병도가 친일파가 되어 모두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였다. 통탄할 일이었다. 그래서 병상에 있는 이병도를 찾아가 죽기 전에 진실을 밝히는 글을 쓰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저밖에 한국고대사를 제대로 정립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 하나님께 90살까지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역사공부를 시작했다. 그동안 자료 수집을 위해 일본 대만 미국도서관 등을 수없이 다녀왔다.”
일제 강점기 황해도 은율의 산골에서 한국인이 가르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닌 뒤 일본에 유학 간 그는 일제가 가르치는 역사를 배우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또 한문, 일본어, 중국어, 영어까지 능통한 지식인이다. 미 군정시설 부산대총장을 거쳐 서울대학장(사실상 총장)이 된 그는 미군정에 건의, 고등고시에 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채택케 했다. 그는 ‘한국상고사’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등 3권의 책인 낸 뒤 2001년 106세에 세상을 떠났다.
최태영 선생의 진정한 역사 찾기 정신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인하대 윤한택 교수의 역사연구는 또 하나의 예다. 그는 ‘두 개의 압록강’과 ‘두 개의 평양’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열정 가득한 학자다. 지난달 2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한뿌리사랑 세계모임(대표 김탁)’ 역사포럼에서 ‘고려의 서북국경에 대해서’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그에게서 ‘최태영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의주는 본래 고구려 용만현이다. 또 화의라고 부른다. 처음에 거란이 성곽을 압록강(鴨綠江) 동쪽 언덕에 설치하고, 보주(保州)라고 호칭하였다. 문종 조에 거란이 또 궁구문을 설치하고 포주(抱州)라고 호칭하였다. 달리 파주(把州)라고도 한다, 예종 12년에 요 자사 상효온이 도통 야율렬 등과 더불어 금 병사를 피하여 바다로 도망가면서 우리 영덕성에 공문을 발송하여 내원성(來遠城) 및 포주를 우리에게 귀속시켰다. 우리 병사가 그 성곽에 들어가 무기와 화폐, 곡물을 수습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고쳐서 의주방어사로 삼고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 공민왕 15년에 승격하여 목으로 삼고, 18년에 만호부를 설치하였다. 별호는 용만이다. 압록강(鴨綠江)이 있다. 달리 마자수(馬訾水)라고 하고 또 청하(靑河)라고 한다.”(고려사 7 세가7)
“요가 압록강(鴨綠江) 동쪽 언덕에 각장(榷場)을 설치하려하자 선종 5년(1088년) 태복소경 김선석을 파견하여 각장을 혁파할 것을 간청하였다. 표문에 말하기를 ..... 갑오년(994년) .... 보좌하는 신하 서희가 경계를 관장하고 왕림하였으며 유수 손녕이 조서를 받들고 상의하여 각자가 양쪽의 경제에 당도하여 여러 성곽을 분배하여 축조하였다 ..... 을묘년(1055년)에는 주의 성곽이 경계에 편입되어 군대를 설치하였으며, 을미년(1055년)에는 궁구를 성치하고 정자를 창건하였는데, 병신(1056)에 요구를 허락하고 옥사를 훼철하였다. 갑인년(1074년)에 정융성의 복쪽에서 탐색 수비 암자를 처음으로 배치하였다.”(고려사 10 세가 10)
“통화 13년(995년) .... 보좌하는 신하 서희가 경계를 관장하고 왕림하였으며, 유수 손녕이 조서를 받들고 와서 논의하여, 각자가 양쪽의 경제에 당도해서 여러 성곽을 분배하며 축조하였다. 이 때문에 하공진을 선발, 파견하고 압록수(鴨淥水)를 담당하게 하였다. .... 갑인년에 뜬 다리를 축조하여 수로를 교통하였고, 을묘년에는 경제를 넘어 축성해서 군대를 설치하였으며, 을미년에는 궁구를 설치하고 정자를 창건하였다. ...... 갑인년에 정융성의 북쪽에 탐색 수비 암자를 처음으로 배치하였다."(동문선 48장)
“마자수는 말갈 백산에서 나오며 모양이 오리머리같다고 해서 압록수(鴨淥水)라고 부르는데 국내성을 지나 서쪽에서 염난수와 합수하고, 또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라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鴨淥) 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로 사람들을 건네주니 기인해서 믿고 요새로 요긴다.”(구당서 220 열전 145 동이 고려)
고려와 거란의 국경선인 압록강의 한자 표기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동문선, 당서(구당서 신당서), 요서, 원사에는 한자 표기가 鴨綠江(水)과 鴨淥水, 鴨淥, 鴨江 등 다양하게 나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란과 고려의 국경을 상징하는 압록강이 현재의 압록강은 아니라는 점이다. 윤한택 교수는 국경선의 압록강(鴨淥江)과 후방 수비선의 압록강(鴨綠江)을 혼재해서 쓴데서 생긴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특히 요사(遼史)에는 구체적으로 설명를 예로 들었다. 특히 거란은 상대국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고려의 대요사적(大遼事蹟)을 수집, 고려군의 국경선 병력까지 상세하게 기록, 압록강(鴨淥江)의 위치를 확실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동경에는 압록(鴨淥)서북봉까지 경제로 삼았다. 황룡부(黃龍府)의 정병이 5000, 함주(咸州)의 정병이 1000이다, 동경에서 여직의 경제를 따라 압록강(鴨淥江)까지 군사초소가 무릇 70개인데, 각각 수비 군사가 20인으로 합계 정병 1400명이다. 내원성(來遠城) 선의군영(宣義軍營)이 여덥개인데 태자영(太子營)에 정병 200이고, 대영(大營)에 정병이 600, 포주영(浦州營)에 정병 200, 신영(新營)에 정병 500, 가타영(伽陀營)에 정병이 300, 왕해성(王海城)에 정병이 300이며, 유백영(柳伯營)에 정병 400이고, 옥야영(沃野營)에 정병 1000이다. 신호군성(神虎軍城)의 정병이 1만이다. 대강(大康) 10년(1084)에 설치하였다. 이상 1부 1주, 2성, 70보, 8명에 합계 정병 2만2000명이다.”(요사(遼史) 36 지(志)6 병위지하(兵衛志下)
그는 이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했다. 내원성 선의군, 태자, 가타, 포주(보주), 유백영 등 지명은 모두 압록강(鴨淥江)에 연해 있음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동경, 황룡부, 함주가 소재하고 있는 현재 요녕성 요하연안이고, 보주는 요사지리지에 선의군절도로도 기록돼 있음도 지적했다. 따라서 고려사의 압록강(鴨綠江)은 압록강(鴨淥江)의 오류이고, 선의군 남쪽이라고 한 동문선의 기록이 옳고, 무엇보다 요사가 고려사보다 편찬 시기가 앞서고, 더구나 상대의 기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실 1344년에 편찬된 ‘요사’에는 여직(女直) 압록강(鴨淥江), 여직국(女直國) 압록강(鴨淥江)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사에는 심지어 ‘을유에 대군사가 압록강(鴨淥江)을 건넜고, 강조(康兆)가 항거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였다’라고 고려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기록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신당서’의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송대의 지리지인 무경총요와 청대에 편찬된 요사습유에서도 압록강(鴨淥江)으로 표기돼 있어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면 고려와 거란의 경계가 언제 압록강(鴨淥江)이 압록강(鴨綠江)으로 바뀐 것일까? 그는 변천사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요사 역시 초기기록에는 압록강(鴨淥江)으로 표기했으나 근대에 편찬된 요사휘편에서는 여진(女眞) 압록강(鴨綠江)으로 바뀌고, 그 위치까지도 청대에 편찬한 통감집람을 인용하여 길림과 봉황성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압록강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심지어 통전의 마자수까지 마채수(馬砦水)로 잘못 인용한 점도 지적했다. 조선시대 저술된 우리의 고려사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압록강(鴨綠江)으로 기록하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의 철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려와 거란의 국경선이 압록강(鴨淥江)이라는 근거 제시는 고려사 94열전7 류소와 82 지36 병2 성보와 고려사절요 4 덕종경강대왕 부분에도 확실히 지명과 위치를 기록하고 있음을 제시했다.
“2년 소(韶)가 북경관방을 비로소 설치하였다. 서해(西海) 바닷가 예전 국내성 경제 압강(鴨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 흥화 정주 영해 영덕 영삭 운주 안수 청새 평로 영원 정융 맹주 삭주 등 13성곽을 넘어 요덕 정변 화주 등 3성곽에 이르렀다.”
흥화는 국경분쟁 때마다 거론됐던 곳이고, 정융은 박인량의 표문에서 1074년 앙자를 철거한 지역이다. 따라서 그는 압강(鴨江)이 압록강(鴨淥江)임은 다툴 수 없는 근거라는 것이다. 요사(遼史)103 열전33에도 압록강(鴨淥江) 파수 사업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고려도경에도 압록강(鴨淥江)을 압강(鴨江)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에도 고려 때의 도읍 안시성(安市城)은 일명 안정홀(安丁忽)인데 요수(遼水)의 북쪽에 있으며, 요수는 일명 압록(鴨淥)이고 지금 안민강(安民江)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두말할 나위 없다. 다행히 일제는 안시성의 위치까지 옮기지는 않았다.
또 그는 지금의 평양은 옛날 평양이 아님도 밝혔다.
“압록의 수원은 말갈에서 나와 그 색깔이 오리머리와 같아 그에 따른 이름이 지어졌다 .... 압록의 서쪽은 또 백랑(白狼) 황암(黃嵒) 두강이 있는데 파리성(頗理城)에서 몇 리를 가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가는데 이것이 요수다 ... 당지(唐志)를 상고하건데 평양성은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에 있다. 당 말에 고려 군장이 누대의 전쟁 난리로 혼이 나 조금 이동하여 동쪽으로 갔다. 지금 왕성은 압록수의 동남쪽 천 여리에 있으니 예전의 평양이 아니다."(고려고경 3 국성)
원사(元史)에도 압록강(鴨淥江)과 평양의 위치가 확실하게 기록돼 있음을 지적했다.
“그 국도를 평양성이라고 하는데 바로 낙랑군이다. 물이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 것을 압록강(鴨淥江)이라고 하는데 평양은 그 동남쪽에 있다. 고려의 항구가 탐라에서 압록강(鴨淥江)까지 미치고 있고, 또 고구려국도 평양의 서북쪽에 있는 압록강(鴨淥江)이 있다.”
거란과 고려 국경도시 중 하나인 함주(咸州)에 대해서는 2010년 중국에서 발간된 철령 지역 지방지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개태 8년(1019년) 군대 집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려와의 영역 경제인 지금의 개원노성(開原老成) 지방에 함주(咸州)를 건립하고, 지리의 도움을 빌려 고려에 대해 전개하는 신공세를 준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우리 교과서에는 함주(咸州)의 압록강(鴨淥江)이 아닌 현재의 압록강(鴨綠江)으로 나오고, 철리장선의 위치도 압록강(鴨綠江)하류에서 원산 쪽 정주로 그어져있다. 일제 때 한국 고대사를 조작한 이마니시류(今西龍)는 그 작업을 하다 오른손 마비가 오자 피나는 노력 끝에 왼손으로 글을 써 작업은 완수했다고 한다.
이날 강연 후 자신의 책 ‘압록(鴨淥)과 고려의 북계’에 사인해주는 윤 교수의 손은 몹씨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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