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황은 배달국 14대 임금(BC 2707~2599)이다”(규원사화와 환단고기)
일명 ‘도깨비’와 ‘붉은 악마’로 알려진 치우천황(蚩尤天皇)은 단군시대에 앞서 환웅시대의 인물이다. 우리 동이족(東夷族) 즉 한족(韓族)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서조차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치우천황 사당은 지금도 태국 베트남 미얀마 등에도 수없이 많다. 그들은 지금도 그곳에서 북쪽을 향해 절을 한다.
우리 민족은 전쟁터에 나기기 전에 항상 치우천황 사당에 절을 하고, 치우천황 깃발을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 현재 육군사관학교 투구 상징마크 역시 치우천황상이다. 한국의 기와집 와당과 기념석 등에는 여지없이 치우천황상이 그려져 있었다. 청개천 복원공사 중 치우천황상이 새겨져 있는 돌이 많이 발견되었음을 물론이다.
추석 연휴 동안 안시성 영화를 봤다. 짜임새와 스토리전개가 아주 인상 깊었다. 촬영기법도 완성도가 높았다. 오랜만에 조선시대 극이 아닌 고구려 영화를 만날 수 있어 느낌이 달랐다. 앞으로 이런 영화가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우리는 사대주의와 공자를 위한 조선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영혼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조선 500년사만 다루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한국의 역사책을 모두 일본이 가져가 쇼로부(書陵部) 황실도서관에 숨겨놓아 우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등 외에 고전의 역사서를 보기 힘들다. 쇼로부 도서관에는 26만권의 한국고서적이 보관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안시성을 보면서 느낀 몇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사극이지만 국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영화이니 만큼 완성도 측면에서 조금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첫째, 이세민(당대종)의 투구가 치우천황을 담고 있어 놀랐다. 적장의 투구가 우리민족의 상징인 치우천황 투구라니... 아마 일제가 만들어준 역사로 공부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유일 것이다. 한·중 역사기록에 의하면 치우천황은 중국의 한족(漢族)과 중원의 패권을 놓고 70여회나 전투를 했다. 한단고기와 규원사화에서는 치우가 먼저 제위에 올라 배달나라 영토를 중국의 산둥반도 이남에 있는 희대 땅까지 넓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치우천황은 배달국의 14대 천황으로 기원전 2700년대에 생존했던 불패신화의 인물이다. 중국의 역사책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본기에는 “제후들이 모두 헌원(軒轅)에게 복종했는데 오직 치우만이 난폭해서 헌원도 징벌할 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는 강점기 한국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 한반도에 있는 수많은 치우천황 사당을 다 없애버렸다. 현재 성수동 뚝섬의 본래 이름은 독도(纛島)다. 치우천황 사당이 있던 곳이라는 뜻이다. 즉 치우천황사당의 상징 깃발은 모두 꿩 꼬리로 장식했다. 독(纛)은 꿩꼬랑지 깃 독이다. 우리 민족은 기(旗)도 꿩의 꼬리로 장식했고, 임금이 타고 가던 가마 또는 군대의 대장 앞에 세우던 큰 의장기는 둑(纛)이라고 했다. 꿩의 꼬리로 장식한 큰 기(旗)를 도라고 했다. 뚝섬의 치우천황 사당에는 치우천황과 중국의 시조 헌원이 북경 북쪽 탁록에서 싸우던 ‘탁록전투’의 대형 걸개 그림이 있었는데 일제 때 사라졌다.
둘째, 고구려 군대 개마무사의 상징은 비늘갑옷이다. 비늘갑옷은 최첨단 하이테크 무기다. 잉어 비늘처럼 갑옷을 만들어 가볍고 전투에 강하다. 유럽이 중세까지 통갑옷을 입고 다녀 쓰러지면 스스로 일어나지 못했던 것과 비견된다. 그런데 비늘갑옷이 오히려 당나라군의 옷으로, 고구려군의 군복은 다른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은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양만춘 장군이 전쟁을 하면서 투구를 쓰지 않고 싸우는 모습은 아무리 영화라해도 좀 지나치다. 전쟁에서 장수가 머리카락 휘날리며 싸우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마땅히 치우천황 투구와 개마무사의 상징인 비늘갑옷을 입어야 했다.
넷째, 치우천황의 상징 소뿔도 이세민과 그의 군대가 쓰고 있었다. 소뿔은 우리 민족 즉 치우천황의 상징이다. 단오절은 치우천황 탄생일이고, 소뿔를 쓰고 축제를 벌이는 날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고구려 각저총에는 치우의 상징인 소뿔을 쓰고 씨름(치우희)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마 견우(牽牛)와 직녀(織女) 설화도 여기서 비롯됐을 것이다. 견우는 소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 부족, 직녀는 실크를 짜서 먹고사는 부족을 뜻한다. 우리민족의 원류인 요서지방의 ‘홍산문화’에는 그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에는 용의 원조인 석소룡과 소뿔 문양 등은 실크제작과 관련이 있는 옥잠(玉簪) 등도 출토됐다. 옥잠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문화에서도 수없이 출토되고 있다.
다섯째, 고구려군과 당나라군이 평지에서 전투하는 장면은 눈에 거슬린다. 고구려군이 중국과 싸워서 백전백승을 거둔 것은 협곡과 치성(雉城)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치성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쌓은 성이다. 또 곳곳에 꿩꼬리처럼 뛰어나온 모습의 성을 쌓아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가까이 오면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곳 누각을 ‘포루’라고 한다. 고구려는 이런 여러 개의 성을 쌓아 하나가 함락돼도 다른 성이 또 나라를 지키는 전략이다. 당태종은 수양제가 수백만명으로 침범했으나 보급로를 차단과 성의 공동화전략으로 실패한 사례를 참고로 정예부대만으로 속전속결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숙제를 끝내면 또 하나의 숙제가 기다리는 고구려의 많은 성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수양제는 군인 130만명 보급인력 300만명으로 침범했으나 을지문덕장군에 의해 몰살당하고 살아간 자가 20만명에 그쳤다한다. 고구려는 수나라 군의 시체로 산을 만들고 꼭대기에 정자를 지었다. 그 정자 이름이 '경관'이다. “경관 좋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됐다. 당나라는 이 경관을 허물어 달라고 수없이 요청해왔다. 고구려 침공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다.
여섯째, 동이족의 쓰는 활은 맥중(貊弓) 즉 ‘융합활’이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조선인을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불렀다. 이(夷)자는 '오랑캐 이'가 아니라 큰대(大)자에 활궁(弓)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큰 활 맬 이’자다. 동쪽에서 큰 활을 메고 다니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맥궁의 중국활과 서양활에 비해 사정거리가 차원이 달랐다고 한다. 분명 이세민은 사정거리 밖에서 진두지휘했을 것이다. 그러나 양만춘 장군의 독화살은 그의 왼눈에 꽂혔다. 그럼에도 우리는 동쪽 오랑캐로 배우고 있다. 일본이 정립해놓은 잘못된 역사교육의 탓이다. 동이족은 키가 크고, 이가 가지런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 고구려가 망한 것은 형제간의 싸움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왕위를 세습하지 않고 저 세상으로 갔다. 장남 남생이는 왕위의 명분을 얻기 위해 당나라를 혼내주기 위해 전선으로 갔다. 이 때 셋째 동생 남건이가 평양성(현재 심양근처)에서 쿠테타를 일으켰다. 화가 난 남생은 고구려 주력군 전체를 끌고 당나라에 투항 했다. 그리고 당나라군과 함께 평양성을 침공했다. 667년, 결국 불멸의 고구려는 함락되고 말았다.
형제간에 싸우면 가정과 기업,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 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안시성 2’를 기대해본다.
오창규 데이터뉴스 대표 / chang@data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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