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바이오팜이 개발한 뇌전증 치료제 ‘엑스코프리’가 22일 미국 FDA로부터 신약 승인을 받았다. SK바이오팜은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개발, 신약 허가까지 전 과정을 독자 수행한 국내 최초의 제약사가 됐다. 사진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오른쪽)이 2016년 6월 경기도 판교에 위치한 SK바이오팜을 방문해 연구진으로부터 개발 중인 신약 물질에 대한 설명을 듣는 모습.
“1993년 신약 개발에 도전한 이후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20년 넘도록 혁신과 패기, 열정으로 지금까지 성장해 왔습니다. 글로벌 신약 개발사업은 시작할 때부터 여러 난관을 예상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꾸준히 투자해왔습니다. 혁신적인 신약 개발의 꿈을 이룹시다.”
2016년 6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경기도 판교 소재 SK바이오팜 생명과학연구원을 찾아 이렇게 말하며 구성원을 격려했다. 그로부터 3년 만에 SK바이오팜이 개발한 뇌전증 치료제가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신약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SK바이오팜은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개발, 신약 허가까지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수행한 국내 최초의 제약사가 됐다.
SK바이오팜은 뇌전증 신약 ‘엑스코프리’(성분명 세노바메이트)가 미국 FDA의 품목 허가를 받았다고 22일 밝혔다. 엑스코프리는 SK바이오팜이 2001년 후보물질 탐색, 임상시험, 지난해 FDA 허가 신청까지 독자 진행한 뇌전증 신약이다. FDA로부터 성인 뇌전증 환자의 부분발작 치료제로 허가받았다.
SK바이오팜은 북미·유럽·아시아·중남미 등에서 24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임상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 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를 통해 현지 허가를 신청했다. 1~3개 뇌전증 치료제 복용에도 불구하고 부분 발작이 멈추지 않는 성인 환자 대상의 임상시험에서 엑스코프리는 위약 투여군 대비 유의미하게 발작 빈도를 낮췄다. 또 약물치료를 유지하는 엑스코프리 투여군 28%에서 발작이 발생하지 않는 완전발작소실이 확인됐다. 위약 투여군에서는 9%였다. 완전발작소실은 환자가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삶의 질을 크게 개선한다는 점에서 뇌전증 신약을 평가하는 주요 지표다.
엑스코프리는 최 회장의 뚝심과 투자 철학이 없었다면 빛을 볼 수 없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신약 개발은 통상 10~15년간 수천억 원의 비용이 투입되고도 5000~1만 개 후보물질 중 1~2개만 신약으로 개발될 만큼 성공을 확신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연구 전문성은 물론, 경영진의 굳은 육성 의지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영역이다.
SK는 1993년 대덕연구원에 연구팀을 꾸리면서 제약사업에 발을 들였다. 많은 국내 제약사가 실패 확률이 낮은 복제약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SK바이오팜은 혁신신약 개발에 매달렸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최 회장의 비전과 확고한 투자 의지였다.
2002년 최 회장은 바이오 사업을 그룹의 중심축 중 하나로 세운다는 장기 목표를 제시했다. 신약 개발에서 의약품 생산, 마케팅까지 모든 밸류체인을 통합해 독자적인 사업역량을 갖춘 글로벌 바이오·제약기업을 키워낸다는 비전이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생명과학연구팀, 의약개발팀 등 5개로 나누어져 있던 조직을 통합, 신약 연구에 집중케 하는 한편, 다양한 의약성분과 기술 확보를 위해 중국과 미국에 연구소를 세웠다.
2007년 지주회사 체제 전환 이후에도 신약개발 조직을 분사하지 않고 지주사 직속으로 둬 그룹 차원에서 투자와 연구를 지속하게 한 것도 최 회장의 신약 개발 의지를 보여준다. 신약 개발은 단기 실적 압박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투자와 장기 비전이 담보돼야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성공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SK는 최 회장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수천억 규모의 투자를 지속했다. 임상 1상 완료 후 존슨앤존슨에 기술수출했던 SK의 첫 뇌전증치료제 ‘카리스바메이트’가 2008년 출시 문턱에서 좌절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해 SK바이오팜의 미국 현지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의 연구개발(R&D) 조직을 강화하고 최고 전문가들을 채용해 독자 신약 개발을 가속화했다. 이 때 역량을 강화한 SK라이프사이언스가 이번에 FDA 승인을 얻은 엑스코프리의 임상을 주도했고, 발매 이후 미국 시장 마케팅과 영업까지 도맡을 예정이다.
이후 SK는 신약 개발 사업의 집중 육성을 위해 2011년 사업 조직을 분할해 SK바이오팜을 출범시켰다. 꾸준한 신뢰와 지원을 이어온 덕분에 FDA가 요구하는 엄격한 기준과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임상 전 단계를 수행할 수 있는 노하우와 경험이 SK바이오팜에 축적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최 회장은 의약품 생산 사업에도 공을 들였다. 최 회장은 2015년 SK바이오팜의 원료 의약품 생산 사업부를 물적분할해 SK바이오텍을 설립했다. SK바이오텍의 전신인 원료의약품 생산사업부가 1998년부터 특허 만료 전의 고부가가치 원료의약품을 글로벌 제약사들에 수출해온 경쟁력에 주목한 것이다. SK바이오텍은 2017년 글로벌 메이저 제약사인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의 아일랜드 생산시설을 인수했다. 2018년에는 SK㈜가 미국의 위탁 개발·생산업체 앰팩 지분 100%를 인수했다. 인수 1년 만인 지난 6월 앰팩 버지니아 신생산시설 가동을 시작되면서 한국-미국-유럽의 글로벌 생산기지가 전면 가동에 돌입했다.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이항수 PR팀장은 “SK의 신약개발 역사는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해 혁신을 이뤄낸 대표적 사례”라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제약사의 등장이 침체된 국내 제약사업에 큰 자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동식 기자 lavita@data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