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규 칼럼] 10.26과 미국, 그리고 전두환

이 작자(박정희 대통령)가 2분 안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방을 나가버리겠다

1979년 7월 30카터 미 대롱령은 청와대 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제안보정세에 관한 설명을 듣다 화가 치밀자 배석했던 사이러스 국무장관에게 이같은 쪽지를 건냈다그들은 곧바로 청와대 회담을 박차고 나와 미8군으로 직행했고새벽같이 본국으로 날아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카터는 2015년 발간된 자신의 자서전(A Full Life-Reflections at Ninety)에서 이날 회담에 대해 동맹국 정상과의 회담 중 가장 불쾌했던 순간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당시 카터 미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며주한미군철수 카드를 들고 청와대를 찾았다그날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의 관례나 혈맹인 양국 관계의 전통을 외면한 채 작심한 듯 카터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강의했다박 대통령은 핵개발카드로 맞섰던 것으로 알려졌다그리고 얼마 후, 10.26사건(박정희 대통령 시해)과 12.12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세상과 이별했다그의 죽음을 계기로 자서전에 밝힌 10.26사건 배경을 짚어본다이 사건은 80년대 중반 언론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가장 궁금한 것 중의 하나였다김재규(안기부장)가 육군참모총장(정승화)을 사건 현장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켜놓고대통령 시해 후 피범벅이 된 아와셔츠를 입고 곧바로 그와 함께 육군본부로 가 비상계엄을 논의한 부분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그가 육본에 도착하자마자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건 부분도 그렇다그는 형님 이리로 오시오... 여기 다 모여있으니 국무총리 모시고 이리로 오시오육군참모총장도 국방장관도 여기 모두 있습니다라고 했다뿐만아니다. 자서전에서도 나왔듯이 정승화 국군참모총장이 당시 상관인 노재원 국방장관에게 즉시 보고를 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1987년 대선에서 야당인 김영삼 후보캠프에 합류한 점이다.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가 왔다. 2017년 봄전 전대통령의 자서전이 나오자마자 단숨에 읽었다필자는 줄곧 김영삼-김재규-정승화-김계원’, 그 뒤에는 미국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자서전을 보면 필자의 생각이 김영삼 부분을 제외하곤 적중했다자서전에는 이렇게 회고됐다.

박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미국이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퍼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방 정권의 전복...’ 운운한 카터의 경솔한 용어 사용은 그것이 냉전체제 속에서의 미국의 교만이고딜레마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도 10.26사건에 미국이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을 보면서 김구 선생의 암살도 오버랩됐다. ‘잊혀진 CIA역사라는 책을 보면 더욱 그렇다우방이었지만 맘에 들지 않던 월남 고 딘 디엠 대통령 정권을 CIA를 시켜 제거해버렸던 사건은 한 예에 불과하다. 10.26사건 이후 글리멘트 재블로스키 미 하원 외교위원장이 박정희 암살 공모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는 지 집요하게 의문을 제기한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자서전의 흥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당시 김영삼 총재는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넣어 박정희정부를 통제해야한다고 주문했다박대통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국회에서 축출해버렸다이는 부마사태 발단의 한 요인이 됐다.

정승화가 10.26사건 이전에 김재규와 만나 김영삼씨가 민주당 총재로 당선된 배경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또 김재규는 정상회의 전후로 한 달 동안 글이스틴 대사를 최소한 세 차례 만나고 있었다포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서술지부장도 자주 만났다.

카터대통령이 10.26사건 직전 워싱턴의 한 방송국과 대담에서 한 얘기도 흘려들을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는 우방과 친구교역 상대방과의 관계를 단절해 그들을 소련의 영향권에 넘길 수는 없다... 그리고 그들 정권이 우리의 인권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는 전복시킬 수 없다... 그들 정권... 전복...”

전 전대통령은 전복이라는 어휘에 주목했다고 강조하면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미국 카터 행정부가 박정희 대통령을 버렸다는 확신을 갖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했다김재규가 미국에 의해 원격 조종당한 것이거나 암시를 받았던 것이라는 추측들이 그럴듯한 시나리오로 받아들여졌다(전대통령)는 10.26 사건에 미국이 관련되었을 걸리라는 추측이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그 때 김재규-김계원-정승화까지 연루된 이 사건은 어쩌면 미국의 묵인이나 최소한 암시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식적 의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이같은 정보를 가장 빨리 습득할 수 있는 사람은 안기부장과 보안사령관이다안기부장은 당사자다보안사령관은 군 하나회조직의 수장인 전두환이었다더구나 그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사이가 아주 안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쿠데타를 결심할 동기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는 자서전에서 정승화 총장을 안가 본관에 대기시켜놓고 있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면서 중앙정보부장과 계엄사령관이 손잡고 진행 중인 유혈혁명에 내가 운명적으로 장애물이 되어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이와 관련국회의장까지 지낸 모 인사는 90년대 초 필자에게 "10.26 직전 당시 정가 분위기는 심각했다면서 나도 김영삼 정권, 최형우 안기부장 내정설까지 들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전두환은 권력을 쥐자마자 한반도 비핵화’ 선물을 들고 위싱턴을 방문했다미국의 목적은 한반도 인권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맞춤형 선물을 준비한 셈이다김영삼 정권이 그 때 이뤄졌어도 마찬가지 선물이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하지만 전두환이 대통령 권유를 거부하고국가 안정 후 뒤로 물러났더라면... 핵보유 한국이 됐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만감이 교차한다그의 사망을 계기로 격동의 역사 한 토막을 짚어봤다.

chang@datanews.co.kr

[ⓒ데이터저널리즘의 중심 데이터뉴스 -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