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같은 금융위기가, 기후 재해로 인한 부동산 시장 붕괴로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 잇따라 제기됐다.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FRB)와 유럽중앙은행(ECB)을 비롯한 글로벌 금융당국은 “기후 충격이 금융의 시스템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부동산 가치 하락→대출 연체→금융 시스템 마비의 악순환을 우려하고 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기후 재해 고위험 지역의 주택 보험료는 저위험 지역보다 평균 82% 높았다. 특히 보험 갱신 거부율도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 재무부 연방보험청(FIO)이 2018~2022년 데이터를 조사한 결과다. 영국 영란은행 전 총재 마크 카니가 언급한 ‘기후 민스키 모멘트(climate Minsky moment)’, 즉 기후변화로 인한 갑작스러운 시장 붕괴가 현실화될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 미국·유럽·호주 등에서는 실제로, 보험사가 철수하고 주택 가치가 하락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당시, 혼란의 주된 원인은 부동산 시장이었다. 2006년,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기지 담보 증권이 사실은 위험한 서브프라임 대출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미국 주택 시장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 모기지 연체와 압류가 급증하자 증권의 가치는 급락했고, 투자자들은 큰 손실을 입으며 시장에 공포가 퍼졌다. 이후 정부는 대규모 구제금융과 개혁을 통해 금융 시스템을 복구시켰다.
오늘날 대형 은행들은 자본이 확충됐다. 규제가 강화돼 투자자들은 더 안전해졌다. 하지만 요즘은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경고가 매달 쏟아지고 있다. 이번엔 위험한 대출 관행이 아니라, 기후재해가 증가하면서 보험사와 주요 금융기관에 압박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미 상원 예산위원회는 2023년 말 보고서에서 “주택 가치가 결국 2008년처럼 하락하고, 미국 경제는 2008년과 유사하거나 그보다 더 큰 시스템 충격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24년 1월, 미국 금융안정위원회는 자연재해 위험 지역에서 보험이 점점 비싸지고 부족해지고 있다면서 “기후 충격은 시장 전반의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2월 초,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도 “10~15년 후엔 일부 지역에서는 주택담보대출도, 현금 자동지급기도, 은행 지점도 사라질 수 있다”고 의회에 밝혔다. 같은 달, 워런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들에게 “폭풍으로 인한 피해 증가로 보험료가 올랐고, 기후변화는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며 “언젠가, 아무 때나 엄청난 보험 손실이 발생할 것이고, 1년에 한 번이라는 보장도 없다”고 경고했다.
유럽이 사상 가장 더운 3월을 기록하던 중, 독일 보험사 알리안츠의 경영임원 귄터 탈링거는 “기후온난화가 심화되면 보험사들은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되고, 이는 금융 시스템의 근간을 위협하는 체계적 위험이 된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주택에 대해, 보험 없이는 대출도 불가능하다. 보험사가 재해 지역에서 철수하면 대출이 끊기고, 은행 지점은 사라진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주택 가격은 하락하고 주택융자금(mortgage) 연체와 부채 붕괴가 뒤따른다. 대출기관들은 줄도산하게 된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호주,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산 집이 빚보다 가치가 낮아지는 ‘깡통주택’에 살게 된다. 결국 모기지 연체, 압류, 신용카드 연체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번 위기의 원인은 금융이 아니라 기후다. 그리고 이 위기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조차 불분명하다고 FT는 지적했다.
금융계는 그동안, 탄소중립정책으로 인한 석유·석탄 등 화석연료의 전환 리스크를 최대 위협으로 꼽아왔다. 그러나 산불, 홍수 등 예측을 뛰어넘는 재해들이 잇따르며 “물리적 리스크가 더 빠르게 금융 시스템을 침식할 것”(패트릭 볼턴 컬럼비아대 교수)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고 FT는 진단했다.
물리적 리스크는 눈에 띄게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해 4월, 엄청난 폭우가 두바이를 마비시켰고, 수천 명이 중국에서 대피했다. 몇 달 뒤, 태풍 야기(Yagi)가 동남아를 강타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10월에는 플로리다를 단 13일 간격으로 두 개의 대형 허리케인이 강타했다. 스페인 발렌시아에서는 몇 시간 만에 1년치 비가 쏟아져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3개월도 지나지 않아, LA에서는 대형 산불이 발생해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천 채의 고급 주택이 소실됐다.
올해도 재앙은 계속됐다. 3월 한국에서는 역사상 최악의 산불이 발생했고, 일본 역시 수십 년 만에 최악의 산불로 수천 명을 대피시켰다. 캐나다에서도 대피령이 내려졌고, 호주에서는 대홍수로 경제성장에 타격을 입었다. 북미·유럽·아시아 전역에서 폭염 경보가 내려졌다.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으며, 완화 조짐은 없다. 지난해에는 지구 평균기온이 12개월 연속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상승을 기록했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5년 안에 2도 상승을 기록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연방보험청 폐지 법안이 발의되는 등 기후 리스크의 감시 체계가 약화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파리협약 탈퇴를 재개하고, 기후 관련 과학 기관 예산을 삭감하며 “기후 변화 대응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 장관)라는 극단적 발언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대해, 아데어 터너 전 영국 금융감독청(FSA) 의장은 “부동산 같은 거대 자산군의 가치 하락이 금융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팬실베니아대학 워튼스쿨의 벤 키스 교수는 “기후 리스크는 회복이 불가능한, 한 방향으로 향하는 영구적 충격”이라고 강조했다.
권세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