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거래소 바이낸스에서 발생한 사상 최대의 해킹 사고는 중앙화 거래소라는 생태계의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탈중앙화를 내세운 가상자산 시장에서, 정작 중앙화 거래소(CEX)에 자산을 맡기는 모순이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원장 자체는 뚫리지 않았다.
에스와르 프라사드(Eswar Prasad) 코넬대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최근 ‘탈중앙화 금융이라는 가상화폐 혁명의 약속’ 제하의 기고에서 “이번 해킹은 블록체인 문제가 아니다. 그 주변 생태계가 취약점을 키운 것”이라고 짚었다. 그는 ‘화폐의 미래-디지털 혁신이 어떻게 돈과 금융을 바꾸고 있는가’ 등을 저술한 세계적 경제학자다.
FT 기고문에 따르면, 투자자들이 가상화폐 상당 부분을 CEX에 두면서 ‘단일 실패 지점(Single Point of Failure)’이 되살아났다. 외부 현실 세계의 데이터(주가·기상 정보 등)를 블록체인 내부로 연결해 주는 모듈인 ‘오라클(Oracle)’도 숙련된 해커에게는 약점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블록체인 장부 자체가 완벽하더라도, 입구 역할을 하는 오라클에 해커가 잘못된 데이터를 주입하면 전체 스마트 계약이 무력화되기 때문이다. 오라클은 집단 지성에 의해 관리된다는 점이 강점이었으나, 동시에 고도화된 해커의 표적이 되기 쉬운 민낯을 드러냈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이 해커의 취약점 탐색 능력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이 기고문은 강조했다.
FT 기고문에 따르면, 가상화폐 혁명은 ‘금융의 탈중앙화’를 실현하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상업은행과 중앙은행, 정부의 손에 집중돼 있던 권력을 일반 대중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시스템 전체의 작동을 좌우하는 단일 실패 지점은, 탈중앙화된 구조를 통해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구상이었다. 또한, 공개된 디지털 거래원장(Public Digital Ledger)의 투명성이 보안을 한층 강화할 것으로 기대됐다.
기존 금융에서는, 금융기관이라는 전통적인 중개기관에 대한 신뢰가 금융 시스템을 지탱해 왔다고 이 기고문은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 기관은 때때로 자신들에게 맡겨진 신뢰를 저버렸다.
가상화폐가 제시한 새로운 비전은 달랐다. 전통적인 금융 중개기관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감시와 검증을 통해 신뢰가 형성되는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
하지만, 세계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에서 63억 달러(약 8조 4489억 3000만 원) 규모의 대규모 해킹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러한 원대한 약속이 어떻게 중앙집중화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라고 프라사드 교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기고문은 이 해킹사건이, 보안이 뚫린 노트북이라는 인간적 약점과 기술적 취약성이 결합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실수와 기술적 결함이 결합하면, 공격자들에게 매우 강력한 공격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
“블록체인 자체는 해킹되지 않아”
가상화폐 혁명의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에 대해서는 그 공로를 정당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프라사드 교수는 지적했다. 가상화폐 거래 내역이 기록되는 디지털 원장인 블록체인 자체는 이번에도 침해되지 않았다는 것. 여전히 안전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블록체인은 특정 기관이 관리·감독하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기고문에 따르면, 실제로 블록체인의 보안성은 △탈중앙화, 그리고 △투명성에서 나온다. 비트코인과 이더 같은 가상화폐와 연결된 공개형 블록체인은, 단순한 결제나 거래뿐 아니라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을 활용한 복잡한 거래까지 안전하게 실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컴퓨터 코드에 의해 수행된다. 중간에서 거래를 중개하는 기관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기고문에 따르면, 문제는 블록체인 그 자체가 아니다. 탈중앙화 블록체인을 둘러싸고 성장해 온 생태계에 있다. 바로 이 생태계가 새로운 기술적 취약성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가 탈중앙화의 약속을 무너뜨린다”
인간의 심리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프라사드 교수는 강조했다. 컴퓨터 알고리즘에 대한 인간의 신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탈중앙화 거래소(DEX) 등 다양한 대안을 가상화폐 투자자와 거래자들은 이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상당한 규모의 자산을 바이낸스 같은 CEX에 보관하고 있다.
CEX는 단순히 가상화폐 거래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고객의 가상화폐를 대신 보관하는 수탁 기능, △가상화폐 매매와 거래 지원, △기존 금융기관과 가상화폐 시장을 연결하는 입출입 통로(On-ramp·Off-ramp)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CEX는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 △편리함, △익숙함, △안도감(문제가 발생하면 누군가 나서서 해결해 줄 것이라는)이 그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편리함이 탈중앙화를 지향하는 환경에 중앙집중화를 다시 끌어들인다고 프라사드 교수는 역설했다. 이는 단일 실패 지점을 없애겠다는 가상화폐의 근본적인 약속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바이낸스 해킹은 지금까지 발생한 사건 중 가장 큰 규모다. 하지만, 가상화폐 금융 분야에서 발생한 수많은 해킹 사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이 기고문은 밝혔다.
“투명성이 곧 보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가상화폐 시스템에서는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래가 실행될 수 있다.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이동하는 자동화 거래조차 그렇다. 가상화폐 지지자들이 강조해 온 ‘투명성을 통한 보안’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기술에 의존한다고 프라사드 교수는 설명했다.
따라서 기술적 취약점이 발생하면 이 시스템의 가장 핵심적인 신뢰 기반 자체가 공격받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라클이다.
오라클은 서로 다른 시스템 사이에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는 소프트웨어. 각 블록체인은 외부 세계와 분리된 폐쇄적인 환경, 즉 독립된 데이터 공간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탈중앙화 금융(DeFi)에서는 오라클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특정 기업의 주가나 날씨와 같은 현실 세계의 사건을 기반으로 스마트 계약을 작성하려면, 외부 정보를 블록체인으로 전달해야 한다. 이때, 오라클이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블록체인 자체가 완벽하게 안전하더라도 오라클이 부정확하거나 시의적절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한다면, 스마트 계약과 거래의 무결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 프라사드 교수의 말이다.
오라클은 공식 규제기관이 아니라, 가상화폐 공동체가 만들고 감독한다는 점에서 강점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가상화폐 공동체가 아무리 주의 깊게 감시하더라도, 숙련된 해커로부터 이러한 소프트웨어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는 없다.
“AI가 해커들의 공격 능력을 증폭시키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힘의 균형이 공격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AI는 가상화폐 생태계 곳곳에 숨어 있는 미세한 결함을 찾아내고, 이를 악용하는 해커들의 능력을 급속도로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 특히 가상화폐 거래가 집중되는 CEX같은 중앙화된 지점이, 주요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북한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해커들은 더욱 강력한 도구에 접근하고 있다. 가상화폐 생태계가 확대되면서, 공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상도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해킹 공격의 규모와 범위는 앞으로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바이낸스 해킹이 금융시장 전체에 던지는 경고
바이낸스는 이번 해킹 사건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 기고문은 전망했다. 과거의 해킹 사건들처럼 일부 투자자는 금전적 손실을 입겠지만, 가상화폐 시장은 결국 다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가상화폐 자산과 탈중앙화 금융을 지지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금융 규제당국과 각국 정부에도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프라사드 교수는 주장했다. 이들은 자국민을 보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그 여파가 전통적인 금융시장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FT 기고문에 따르면, 가상화폐 시장의 신뢰 위기는 더 이상 가상화폐 투자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존 금융시장과 금융기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새로운 금융안정성 위험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