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추진 중인 ‘디지털 유로화’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등 유럽 주요 경제학자 68명이 유럽의회에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들 학자는 디지털 유로화가 단순한 결제 혁신을 넘어, 미국의 달러 스테이블코인 등 금융·통화 지배에 맞선 최후의 방어선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이들 경제학자는 “디지털 유로가 무산되면 유럽은 통화 주권을 상실하고, 미국 기업과 달러 시스템에 종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CB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로 현금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디지털 유로를 2029년까지 도입하겠다고 추진 중이다.
ECB는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소매용 디지털 유로, 그리고 △중앙은행 자금에 접근할 수 있는 기관만 사용할 수 있는 도매용 디지털 유로를 모두 도입할 계획이다. 그중에서도 유럽이 가장 시급히 필요로 하는 것은 도매용 디지털 유로.
FT에 따르면, 도매용 디지털 유로가 성공적으로 도입되면 세 가지 핵심 이점이 있다. 첫째, 기업과 기관 투자자들이 스테이블코인과 같은 검증되지 않은 민간 혁신의 위험 없이 토큰화 금융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둘째, 유로화가 글로벌 토큰화 금융에서 핵심 통화로 자리 잡을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셋째, 유로 기반 통합 토큰화 자본시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토큰화 금융은 아직 초기 단계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 등 일부 영역은 이미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미국은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금융패권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이는 다른 국가들에는 금융 안정성과 통화 주권 측면에서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FT는 우려했다.
유럽 입장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유로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민간이 발행하도록 장려하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금융 안정성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통화정책 전달과 실물경제 금융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FT는 설명했다.
현재 유럽의 결제 시장은 비자, 마스터카드, 페이팔 등 미국 기업이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유로존 13개국은 자국 디지털 결제 수단조차 없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적극 지원하면서, 유럽 내부에서는 “화폐 주권이 침식되고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FT에 따르면, 피케티 등은 유럽 의회 청문회를 앞두고 의원들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강력한 공공 디지털 유로는 유럽 주권, 안정성, 그리고 회복력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안전장치”라고 주장했다. 유럽 이사회(European Council)는 ECB의 디지털 유로 출시 계획을 지지했지만, 이 제안이 올해 후반 중요한 표결에서 유럽 의회의 과반수 지지를 받을지는 불분명하다. 찬반 세력이 팽팽히 맞서, 결과는 ‘벼랑 끝 승부’가 될 가능성이 크다.
ECB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최근 “미국 결제망의 지배력은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다”며 “우리는 우리 경제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인 화폐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대해 극우 진영은 “현금 말살과 정부 통제의 시작”이라며 반대하고 있지만, ECB는 “개별 거래를 감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공개서한에 서명한 학자들은 유럽이 미국 기반 디지털 결제 서비스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어 “지정학적 영향력, 외국 상업적 이익, 유럽 통제 범위를 벗어난 체계적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경제학자는 13개 유로존 국가가 국내 디지털 결제 옵션이 전혀 없고 비자, 마스터카드, 페이팔 등 “국제 카드 사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FT에 따르면, 유럽 은행업계는 디지털 유로 프로젝트를 축소하도록 로비해 왔다. 디지털 유로가 미국 결제 시스템과 경쟁하기 위한 유럽 민간 부문의 노력을 훼손할 수 있다고 도이체방크, 비엔피 파리바, 아이엔지 등 지역 최대 은행 14곳이 지난해 11월 경고했다. 유럽 은행권은 막대한 비용과 예금 이탈을 우려하며 “정치적 치적용 사업”이라고 비판한다.
유로존 은행들의 총 비용에 대해 피더블유씨는 최대 180억 유로(약 30조 8827억 8000만 원)에 달할 수 있다고 추산하지만, ECB는 60억 유로(약 10조 2942억 6000만 원) 수준으로 보고 있다.
독일 최대 은행 로비 단체인 독일 은행업위원회는 ECB의 계획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며, △소비자에게 실질적인 이점이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스페인 출신 보수 성향 유럽의회 의원 페르난도 나바레테 역시 대폭 축소된 버전을 주장하고 있다.
공개서한을 주도한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 기반 싱크탱크 ‘지속가능 금융 연구소’, 그리고 트리오도스 은행은 금융 로비의 ‘근시안적 반대’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리오도스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한스 슈테게만은 은행들이 소매 고객 예금 이탈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계획에 따르면 개인은 최대 3000유로(약 514만 3830 원)까지 디지털 유로 지갑에 보유할 수 있다. 이는 민간 은행의 예금으로 활용될 수 없다. 그는 “금융 시스템은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공공 전자결제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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