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신제품을 내놓기 전 소비자 반응을 살피기 위해 몇 개월씩 걸리던 ‘시장 조사’는 점차 사라질 듯 하다. 실제 사람의 성격과 소비 습관을 그대로 복제한 ‘인공지능(AI) 디지털 트윈’이 인간 응답자를 대신해 몇 초만에 답을 내놓는 시대가 열렸다고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보도했다.
실제 특정 개인을 심층 인터뷰해 그 사람의 가치관, 선호도, 구매 이력 등을 데이터화한 뒤 이를 AI에 학습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디지털 복제판’은 실제 모델이 된 사람과 거의 흡사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테스트 결과, 실제 인간 조사와 95% 일치하는 정확도를 보였다. 비용과 시간은 획기적으로 단축됐다. 인간 응답자는 설문이 길어지면 집중력이 흐트러지지만, AI 디지털트윈은 ‘무한 심층 질문’이 가능하다. 이때문에, 소비자 내면의 숨은 욕구를 찾는 데 AI 디지털트윈이 훨씬 유리하다고 WSJ는 전했다.
WSJ에 따르면, AI 에이전트가 이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시뮬레이션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국 스타트업 ‘시밀리(Simile)’는 이러한 역량을 활용해 씨브이에스(CVS) 헬스와 갤럽 같은 대기업들이 여론 조사와 시장 조사에서 실제 사람을 대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시밀리는 최근 인덱스 벤처스가 주도한 시리즈 A에서 1억 달러(약 1499억 5000만 원)를 투자받았다. 이 회사는 기업들이 고객 피드백을 수집하고 시장 조사를 수행하던 전통적인 방식을 뒤엎는 신흥 AI 스타트업 중 하나다.
시장 인사이트 산업은 약 1500억 달러(약 224조 8650억 원) 규모. 오랫동안 전통적인 컨설팅 및 시장 조사 업체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AI가 이 분야를 빠르게 휩쓸고 있다. AI 시뮬레이션 ‘인간’은 고객들에게 시장 조사에 대한 빠르고 저렴한 접근 방식을 제공한다고 WSJ는 설명했다. 앤드리슨 호로위츠의 파트너 시마 암블은 이를 “인간을 거치는 대신 택하는 일종의 지름길”이라고 밝혔다.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에 본사를 둔 시밀리의 공동 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 준 박은 “실제 인간과의 대화에서 얻은 데이터를 사용해 AI 에이전트를 훈련시킨다. 이 에이전트들이 해당 인물의 디지털 트윈이 된다”고 말했다. 이 AI 에이전트들은 실제 개인의 선호도, 성격 및 기타 특성을 파악하기 위한 인터뷰를 통해 만들어진 디지털 복제본. 박 대표는 이 데이터를 참가자들의 행동 및 구매 데이터와 결합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일반화 가능성과 가시성을 보장한다”고 덧붙였다.
기업들은 고객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과거에는 컨설팅이나 시장 조사 업체와 계약했다. 이는 몇 개월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 과정이었다. 이제 기업들은 시밀리의 온라인 에이전트 뱅크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 서비스 비용은 고객당 연간 15만 달러(약 2억 2489만 5000 원)에서 수백만 달러(몇십억 원)에 이른다고 박 대표는 밝혔다.
고객들은 자신의 ‘AI 인간’들에게 무한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 고객 조사 작업을 더 저렴하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 시밀리는 행동 예측을 위한 자체 AI 모델을 개발했으며, 이를 다양한 오픈소스 모델과 결합하여 사용한다고 WSJ는 밝혔다.
박 대표는 시뮬레이션 기술에 대한 대기업들의 즉각적인 관심을 확인한 후, 2024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시밀리를 분사했다. 그와 두 명의 공동 창립자는 2023년 인간 행동 시뮬레이션에 관한 논문의 저자이기도 하다. AI로 생성된 인간은 △임상 시험, △표적 집단 심층 면접(FGI), 심지어 △의류 모델링 등 다른 분야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지난 1년간 CVS는 인간 패널에게만 질문하는 대신, 시밀리의 ‘에이전틱 트윈’을 사용해 고객에 대한 질문에 답을 얻었다. CVS는 자사의 디지털 트윈이 동의를 얻은 40만 명 이상의 실제 사람들로부터 받은 290만 건의 응답을 기반으로 한다고 밝혔다.
그 후 기존 설문 응답이나 고객 상담 기록과 같은 자체 데이터를 통해 이 응답들을 보정한다. 테스트 결과, CVS는 에이전틱 트윈이 기존에 알려진 조사 결과와 최대 95%의 정확도로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WSJ는 전했다.
CVS 헬스의 벤처 캐피털 부문인 CVS 헬스 벤처스도 시밀리에 투자했으나 투자 금액은 공개하지 않았다. CVS의 고객 경험 및 인사이트 담당 부사장 스리 나라심한은 “에이전틱 트윈은 인간과 달리 ‘항상 깨어 있는 상태(always on)’라고 생각한다”며, “진정한 돌파구는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질문 개수를 제한할 필요가 없다. AI는 지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CVS는 에이전틱 트윈이 약물 복용 지침을 얼마나 잘 준수하는지 테스트했다. 더 깊이 있는 질문을 통해, 사람들이 약사와 상담하거나 처방전을 재발급받는 문제에 대해 흔히 우려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또한, 만성 질환 환자나 의료진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집단을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다.
반려동물 의약품에 대한 고객 메시지 효능을 테스트한 결과, 사람들이 △반려동물에게 약을 먹이는 것을 귀찮은 일로 여기지 않으며 △수의사와의 협력 서비스 등을 원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CVS는 현재 보유한 AI 시뮬레이션 인물을 10만 명 이상의 에이전트로 확장할 계획이다. 매장 배치나 신제품 디자인 등의 분야에도 활용할 예정이다. 나라심한 부사장은 “에이전틱 트윈에 투자한다면, 전통적인 시장 조사 패널은 그만큼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인간은 여론 조사 분야에도 진출하고 있다. 갤럽의 글로벌 매니징 파트너 조 데일리는 시밀리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1000개 이상의 AI 디지털 트윈을 공동 고객에게 제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책 연구, △트렌드 분석, △기업 연구 등이 주요 관심 분야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건강, △웰빙, △직무 만족도 등의 주제도 다룰 계획이다. 데일리는 “이를 통해 과거보다 훨씬 적은 비용 장벽으로 더 대규모로, 보다 깊이 있게 조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미래에 박 대표는 에이전틱 트윈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멀티 에이전트 시뮬레이션’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결국 더 복잡한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실제 환경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현재 시장 조사가 “AI 생성 인간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기 가장 쉬운 분야 중 하나”라고 가트너의 신흥 기술 분석가 에반 브라운은 평가했다. 마케팅 메시지를 테스트하는 것은 의료 환경에 비해 리스크가 낮고, AI가 잘못될 경우에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은 초기 단계이므로 전통적인 프로세스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여전히 데이터를 직접 수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시밀리는 역할 기반 액세스 제어 및 유해 콘텐츠 모니터링과 같은 안전장치를 채택하고 있다고 밝혔다. AI 환각이나 부정확성을 방지하기 위해, 실제 사람의 응답과 비교하는 사후 테스트(backtesting)를 수행하고 있다고 CVS의 나라심한 부사장은 밝혔다. 연구원들이 불일치 여부를 확인하고 결과의 유효성을 보장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사람에게 질문할 때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듯, AI 에이전트에게도 마찬가지”라며 “우리는 실제 고객과의 대화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WSJ에 강조했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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