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상황에 맞는 돈을 빌려주고 기초 금융 원칙을 몇 가지 가르쳐 주면, 그들은 스스로 번창할 것이다”. 방글라데시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누스의 미소금융(마이크로파이낸스) 철학을 압축한 이 문장은 1983년 그라민 은행 설립 이후 수십 년간 개발도상국 빈곤 퇴치의 ‘교과서’가 됐다. 2006년 유누스는 이 개념을 개척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그런데 노벨상 수상 20년이 지난 지금, 마이크로파이낸스에 대한 다양한 관련 연구들을 진행시킨 결과, “그 어떤 약속도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강력 비판하고 나섰다. 번영으로 가는 길로 여겨졌던 빈곤층을 위한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은, 수십억 달러(수조원)가 투입된 후에도 차주들 대부분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도, 국내에서 햇살론·소액신용대출·새희망홀씨 등 서민금융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저소득층에게 금융 접근성을 제공하고 있다. 해외에는 개발도상국 지원을 위한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으로 동남아·중앙아시아 등지의 마이크로파이낸스를 지원하고 있다.
마이크로파이낸스가 빈곤 해결의 만병통치약?
마이크로파이낸스는 전통적인 은행이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지역사회에 소액대출을 제공하는 제도다. 글로벌 빈곤, 성별 불평등, 교육 접근성 부족 문제를 해결할 자본주의적 만병통치약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야망 중 실현된 것은 거의 없다고 WSJ은 꼬집었다.
상황 개선 효과 미미, 대출 포트폴리오만 성장
연구 결과를 보면,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은 차주들 대부분에게 소득, 소비 또는 영세 기업의 수익 등 주요 경제 지표를 개선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에 6건의 무작위 대조군 실험(RCT)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도, 상업 투자자와 납세자 자금으로 운영되는 개발은행들의 외부 자금 지원은 대출을 폭증시켰다.
월드뱅크 그룹만 해도 2014년부터 2022년 사이에 소위 ‘금융 포용(Financial Inclusion)’ 프로젝트에 약 300억 달러(약 45조 8490억 원)를 지출했다. 이 중 다수가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의 미상환 대출 잔액은 1억 4000만 명 이상의 차주로부터 약 2200억 달러(약 336조 1820억 원)에 달했다. 이는 10년 전의 두 배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대출 규모도 커져, 2025년 기준 차주당 평균 부채는 1381달러(약 210만 9615.6 원)로 불어났다. WSJ은 수만 달러(수천 만원)에 달하는 개별 마이크로파이낸스 계약서를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미소금융의 영리화
개발 프로젝트로 출발한 대출 기관들은 영리 기업으로 변모했다. 높은 금리와 비교적 낮은 채무 불이행률에 매료된 월스트리트와 다른 은행들의 투자를 받으면서다. 상업 투자자들은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의 △지분을 인수하거나, △자금을 지원하거나, △소액 대출을 기초로 한 증권화 부채를 판매했다.
2007년, 멕시코 최대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기관인 콤파르타모스 방코(Compartamos Banco)는 기업공개(IPO)를 통해 약 4억 5000만 달러(약 6873억 3000만 원)를 조달했다. 이후 다른 기관들도 뒤따랐다. 현재 대부분의 대형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은 영리 기업이다. 하지만 이들 중 다수는 여전히 개발은행으로부터 보조금으로 지원되는 자금을 받고 있다.
“영리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기관들은 자신들이 대체하려 했던 바로 그 고리대금업자와 닮아가고 있다”. 놀랍게도 이런 비판은 외부 경제학자가 아닌 마이크로파이낸스의 창시자 유누스 본인의 입에서 나왔다고 WSJ은 개탄했다.
유누스는 상업화된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들이 초심을 잃었다고 경고하면서,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유산이 변질되는 것을 목격하는 가장 이른 비판자가 됐다. 그는 이후 2024년 방글라데시 민주화 운동 후 임시정부 수반으로 추대되기까지 마이크로파이낸스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차주들에게는 파멸적 결과 초래
경제학자들은 6개국 이상에서 차주들의 상환 위기가 과도한 마이크로파이낸스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규제가 미흡한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기관들이 차주의 상환 능력을 무시한 채 대출 포트폴리오 증가 경쟁에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분석한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에서 평균 마이크로파이낸스 차주는 작년에 3900달러(약 596만 8170 원)가 넘는 빚을 졌다. 이는 이 나라 1인당 중위 연간 소득의 거의 3배에 달한다고 WSJ는 비판했다. 현재 상업은행으로 전환된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 기관들의 소액 대출을 포함하면, 차주당 평균 부채는 6000달러(약 918만 1800원)를 초과한다. 현지 인권단체들은 과도한 마이크로파이낸스 부채를 자살, 이주, 아동 노동, 식품 소비 감소와 연관 지었다고 WSJ는 말했다.
인도에서는 30일 이상 연체된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 비율이 2025년 3월까지 12개월 동안 6.2%로 3배 증가했다. 멕시코에서는 유명 대출 기관이 작년에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빈곤층에 유동성 제공하는 이점은 있어
마이크로파이낸스는 당초 유누스가 구상한 방식대로 차주나 지역사회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지자들은 이것이 빈곤층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업적으로 생존 가능한 기관들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빈곤층이 의료비나 파종에서 수확까지의 기간과 같은 단기적인 현금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대출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고 WSJ은 인정했다.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과 연구자들은 또한, 이를 최적으로 만들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사업 대출과 유사하게 △차주가 첫 상환 전에 유예기간을 부여하거나, △대출과 함께 금융 이해력 교육 과정을 제공하는 것이다.
최근 연구들은 마이크로파이낸스 대출이 기존 창업자들의 사업을 확장하는 데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WSJ은 소개했다. 이는 마이크로파이낸스가 ‘빈곤 탈출’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의 수단보다는, 기존 소기업의 성장을 돕는 제한적 도구로 재정의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회적 금융이 ‘좋은 의도’에 그치지 않으려면
마이크로파이낸스의 실패는,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교훈을 준다. 해외에서처럼, 한국의 서민금융·ODA 사업도 소득·소비 개선에 대한 정량적 추적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국이 지원하는 개발도상국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이 캄보디아식 약탈적 관행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고,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투자자 심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정부 보조를 받으면서 영리 기관화되는 서민금융 기관이 실제로 수혜자 이익을 우선하는지, 반대로 포트폴리오 확장에 집중하는지 등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요구된다. 또, 대출 공급 확대 자체를 성과 지표로 삼는 관행을 탈피해, 차주의 상환 능력 심사와 사후 경제 변화 추적을 핵심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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