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마스터카드 대신, ‘브릭스 국제결제망’ 뜬다

FT, “인도 UPI·브라질 Pix에 ECB까지 연결, 실시간 환전·정산 추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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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를 대체할 브릭스(BRICS) 공통통화’를 만들겠다는 구상이 주춤하는 사이, 전혀 다른 방식의 금융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인도의 유피아이(UPI·Unified Payments Interface)와 브라질의 픽스(Pix) 등 각국 정부가 국내에 구축한 초고속 즉시 결제망(domestic instant payment systems)을 서로 연결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 달러나 비자·마스터카드 등 글로벌 카드 결제망을 거치지 않고 국경을 넘어 돈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결제시장의 주도권이 각국의 ‘국가 결제 인프라’로 이동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BRICS가 지난 12~13일 인도 뉴델리에서 정상회의를 개최한 가운데, 회원국들의 국내 즉시결제 시스템이 새로운 금융 협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BRICS의 공식 회원국은 현재 11개국으로,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에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아랍에미리트(UAE)·에티오피아·이란·인도네시아가 합류했다.


BRICS가 최근 주목하는 것은 각국의 결제망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번 정상회의에서는 하나의 BRICS 통화를 즉시 만드는 것보다, 결제시스템의 상호운용성을 확대하는 방안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BRICS 회원국의 즉시결제 시스템은 최근 18개월 동안 10조달러(약 1경 3853조 원)가 넘는 거래를 처리했다. 특히 인도 UPI와 브라질 Pix는 자국 시장에서 비자·마스터카드 등 기존 국제 카드망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확보했다. 다만 현재 국경간 거래 비중은 아직 매우 작다.


BRICS의 즉시결제 외에도, 각국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인 ‘국제결제은행(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의 프로젝트 넥서스(Project Nexus)도 추진되고 있다. 각국의 국내 즉시결제망을 하나의 표준화된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방안이다. 핵심 아이디어는, Nexus라는 공통 플랫폼을 통해 여러 국가의 결제망과 연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인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은 2025년 ’Nexus 글로벌 페이먼츠‘라는 별도 조직을 만들어, 이 시스템의 실제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FT에 따르면, 큐알(QR)코드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돈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 ‘자국내 즉시결제 시스템’이 빠르게 대중화되고 있다. BRICS 정상들이 뉴델리에 모이는 가운데, 서로 성격이 매우 다른 BRICS 경제권에서 긍정적 공통점들중 하나는 각국의 국내 즉시결제 시스템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시스템은 점점 국경을 넘어, 서로 연결되고 있다.


인도 UPI와 브라질 Pix는 모두, 이들 정부가 지원하는 결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들은 직불카드나 신용카드 네트워크를 거치지 않는다. 대신, 은행 계좌에서 계좌로 직접 돈을 이체할 수 있게 한다.


현재 UPI는 5억5000만 명 이상, Pix는 1억7000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다. 두 시스템 모두, 해외 중앙은행들과의 연계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 같은 연결이 성사되면 국경 간 결제 규모가 확대된다. 이와 동시에, 서로 다른 통화의 신속한 환전 같은 국제결제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최근 UPI 출범 10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도인이 대규모로 거주하는 곳 △인도가 대규모로 교역하는 곳 그리고 △우리와 함께할 준비가 된 모든 나라에서, 우리는 이들을 모두 연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달러 대체할 BRICS 통화는 아직 멀어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최초의 BRICS 4개국이 2009년 처음 만났을 당시, 이 그룹의 핵심 목표 가운데 하나는 미국 달러에 맞설 새로운 글로벌 기축통화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FT는 밝혔다. 이 목표는 그러나,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


가장 큰 장애물중 하나는, BRICS가 통화 측면에서 하나의 통합된 경제·통화권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중국 위안처럼 자본통제가 존재하거나 환율이 사실상 관리되는 통화가 있는 반면, 브라질 헤알처럼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거래되는 통화도 있다. 


따라서 서로 다른 통화로 이뤄진 거래를, 하나의 통화에서 다른 통화로 빠르게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현재 시스템에서는 유동성이 훨씬 풍부한 미국 달러 시장을 중간 단계로 거치는 방식이 효율적인 경우가 많다고 FT는 설명했다.


급성장하는 즉시결제망

하지만 QR코드나 개인 식별용 아이디(ID) 등을 이용해 돈을 실시간으로 보내는 국내 즉시결제 시스템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들 시스템이 국경을 넘어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는 동시에 각국이 통화 환전과 결제대금 정산을 빠르게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압력을 높이고 있다.


브라질 중앙은행 자료에 따르면, Pix는 지난해 6조8000억달러(약 9419조 3600억 원)가 넘는 결제를 처리했다. 인도의 UPI는 올해 3월 말까지 1년 동안 3조4000억달러(약 4709조 6800억 원) 규모의 거래를 처리했다. BRICS 국가 정상들이 회의를 잠시 떠나 커피를 사거나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면, 인도에서는 누구나 UPI를 접하게 될 것이다.


UPI, 국경 밖으로

UPI가 지난 8월 처리한 30조 루피(약 3150억달러·436조 3380억 원) 가운데 국경을 넘어간 거래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UAE, 스리랑카 등 여러 나라가 UPI 결제 수용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싱가포르의 결제 시스템은 이미 2023년부터 UPI와 연동돼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유럽의 즉시결제 플랫폼인 팁스(TIPS·Target Instant Payment Settlement)와 UPI를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 시범사업이 예정돼 있다. ECB는 또 Pix와의 잠재적인 연결 가능성에 대해서도 사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Pix도 거대 결제 플랫폼 성장

Pix는 출범한 지 불과 6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거래 건수 기준 가장 인기 있는 전자결제 수단이 됐다. 글로벌 기업들이 브라질에서 온라인 서비스를 판매할 때도 Pix를 결제수단으로 제공해야 할 정도다. 신흥시장 전문 국경간 결제 플랫폼 에뱅스(EBANX)의 주앙 델 바예 최고경영자(CEO)는 “구글, 메타, 넷플릭스 같은 기업이 브라질에 진출하면 현지 결제수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Pix에는 이제 정기구독 결제와 반복 결제 기능까지 들어가 있다. 이 때문에 해외 기업 입장에서도 현지 결제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간단해졌다는 설명이다.


결제망 통합 논의는 아직 초기

한 BRICS 국가 외교관은 BRICS 내부의 결제 시스템 통합 논의가 아직 “초기 단계”라고 말했다. 그는 BRICS 국가들이 각국의 결제 시스템을 서로 연결하고, 각국 자국 통화로 거래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실제 진전은 민간 부문의 참여 의지와 수출계약 등의 법적·상업적 조건에도 달려 있다고 했다.


무역 불균형도 걸림돌

국가 간 무역 불균형도 통화 연결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예를 들어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를 자국 통화인 루피로 점점 더 많이 결제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입장에서는 루피를 충분히 사용할 곳이 많지 않다. 러시아가 인도로부터 그만큼 많은 상품을 수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인도가 러시아에 루피를 지급하더라도 러시아가 그 루피를 다시 인도에서 사용할 기회가 적다. 이 때문에 단순히 “달러 대신 각국 통화를 사용하자”고 하는 것만으로는, 국제결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새로운 결제·정산 자산이 필요

중앙은행들이 새로운 결제대금 정산 메커니즘(settlement mechanism)이나 공동 기준자산(common reference asset)을 찾는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FT는 짚었다. 분석가들은 그 기준자산으로 금이나, 여러 통화를 묶은 통화 바스켓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런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각국의 즉시결제 시스템을 서로 연결할 수 있다.


소액의 개인 간 송금뿐 아니라, 국가 간 대규모 무역대금 결제에도 활용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현재 시스템보다 더 빠르고, 서방 금융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도 낮은 구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BRICS의 탈달러화 논란

미국은 BRICS가 ‘탈 달러화(de-dollarisation)’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인도 등 BRICS 회원국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EBANX의 델 바예 CEO는 국제결제 분야에 상당한 기회가 있다고 FT에 강조했다. 각국이 ‘다른 나라’의 개입 없이 양국 간 거래를 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특히 국제적 정산(international settlement)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