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 “디지털 금융의 미래는 비트코인 아닌 CBDC”

이코노미스트, “스테이블코인·예금토큰은 보완재” 치폴로네 이사 기고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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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큰화가 확산될수록, 오히려 각국 중앙은행화폐 의존도는 커진다.”

중앙은행을 불필요하게 만들겠다는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의 지난 2008년 주장이 틀렸다고 유럽중앙은행(ECB) 이사가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게재, 관심이 쏠리고 있다. ECB 집행이사회 이사이자 유로지역 디지털유로 태스크포스 의장인 피에로 치폴로네는 이 주간지에 관련 내용을 기고했다.

기고에 따르면, 새로운 화폐의 비전에 대한 나카모토의 기술 미래주의적 야심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동시에, 아무런 기초자산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가상자산의 거대한 가격 상승과 폭락을 촉발했다. 최근에는 관심의 초점이 가상화폐 자체에서 벗어나, 이 기반이 된 기술인 토큰화(tokenisation)와 분산원장(distributed ledger)을 전통적인 금융에 적용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토큰화과 분산원장 기술을 이용하면, △채권, △주식, △예금과 같은 자산을 디지털 데이터 묶음, 즉 ‘토큰’의 형태로 △표현하고 △기록하며 △이전할 수 있다고 기고는 밝혔다. 이들 기술을 토큰화를 결합하면,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이 가능해진다. 

금융거래를 24시간 내내 처리할 수 있게 된다. 현재보다 훨씬 적은 중개기관만 거치면서, 보다 효율적으로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 변화는 금융을 재편하기 시작했다고 기고는 강조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나카모토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밝혔다. 금융이 더욱 디지털화될수록, 금융 시스템은 오히려 널리 신뢰받는 공공 형태의 화폐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당분간 결코 중요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거래는 구매자가 자신이 산 자산을 받고, 판매자가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돈을 받아야 비로소 완결된다. 자동차를 중고로 사는 것부터 채권을 거래하는 것까지 모든 거래가 그렇다. 이를 결제(settlement)라고 한다.

만약 판매자가 대가로 받은 자산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누군가가 발행한 차용증(IOU)을 받거나, 들어본 적도 없는 회사가 발행한 상품권을 받는다면? 판매자는 그 발행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못할 위험에 노출된다. 이러한 위험은 거래의 편의성을 떨어뜨린다. 

중앙은행은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위험이 없는 결제자산(risk-free settlement asset)’을 발행하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기고는 강조했다. 이는 특히 은행과 금융기관들이 매일 수십억 유로(수 조원) 규모의 거래를 처리하는 도매금융시장에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 이런 거래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아무런 위험도 없는 결제자산을 이용해 이뤄지는 것은 필수다. 

오늘날 개인과 기업의 소매거래뿐 아니라 도매거래도, 일반적으로 지급인의 은행과 수취인의 은행 사이에서 결제된다. 이때 사용되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결제자산, 즉 중앙은행 화폐다. 그렇다면 돈을 이동시키는 기술이 변화한다고 해서 이것이 달라질까?

기고에 따르면, 토큰화는 자산이 △발행되고 △거래되고 △관리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거래를 자동화하고, 중개기관을 제거하며, 과거 며칠이 걸리던 절차를 몇 초 안에 처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려면, 투자자들은 여전히 안전한 결제자산을 필요로 한다고 기고는 지적했다.

현재 분산원장 기술에서 이용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화폐’는 그러나,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예금에는 본질적인 신용위험(credit risk)이 존재한다. 반면 비트코인과 기타 무담보 가상화폐는 특정 발행자의 부채가 아니며, 가격 변동성이 매우 크다.

ECB는 여기에서 한 가지 근본적인 교훈을 얻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이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회복력 있는 시장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조건을 조성하고자 한다”는 것. 

이를 위해 중앙은행 화폐를 토큰화된 형태로 제공하는 것이, ECB의 비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즉, 안전성과 보편적인 수용성을 제공하는 공통의 화폐적 기준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성공적인 금융 시스템들은 하나의 공통된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기고는 설명했다. 은행과 지급결제 서비스 제공업체, 금융회사들은 서로 경쟁한다. 하지만, 모두가 공공기관의 신뢰 보증이 작동하는 시스템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왕이 자신의 얼굴을 동전에 새기는 방식으로 신뢰를 보증했다. 오늘날에는 중앙은행이 지폐에 서명하는 방식으로 화폐에 대한 신뢰를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토큰화와 분산원장 기술이 가져오는 효율성 향상을 받아들이되, 이를 중앙은행 화폐가 제공하는 신뢰·안전성·보편적 수용성과 결합해야 한다고 이 기고는 제시했다. 바로 이것이 ECB의 ‘폰테스 이니셔티브(Pontes Initiative)’의 핵심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Pontes는 지난 9월 21일 가동을 시작했다. 이 기고에 따르면, Pontes는 토큰화된 자산이 발행되고 거래되는 플랫폼을 기존 시스템과 연결한다. 이 기존 시스템에서는 이미 중앙은행 화폐를 이용해 거래가 결제되고 있다. 이를 통해 차세대 금융자산도, 전통적인 금융이 기반을 두고 있는 것과 똑같이 견고한 결제 기반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첫 단계일 뿐이다.

ECB의 목표는 2028년까지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를, 자산이 존재하는 동일한 블록체인 위에서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24시간 거래를 포함한 디지털 원장 기술의 모든 장점을, 유럽 금융 시스템의 핵심 인프라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

ECB는 또한, 처음부터 디지털자산을 위한 통합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이기고는 밝혔다. 국경과 플랫폼을 넘어 공유되는 공통 표준을 만들고, 지금까지 유럽 자본시장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시장과 시스템의 파편화(fragmentation)’를 피하려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금융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중앙은행 화폐를 보완하는 다양한 형태의 화폐도 존재할 것이라고 기고는 전망했다.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예금이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 그러나 이러한 민간 화폐가 결제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더라도,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는 여전히 필요하다.

첫째, 서로 다른 민간 디지털화폐 사이의 환전과 전환 가능성을 보장해야 한다. 둘째, 유동성이 여러 형태로 분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째 이유가 있다고 이 기고는 강조했다. 어떤 형태의 화폐든, 어떤 기술을 사용하든 ‘1유로는 1유로여야 한다는 원칙’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 of money)’이라고 중앙은행가들이 부르는 원칙이다.

토큰화가 만들어내는 효율성 향상이 궁극적으로 일반 대중과 발행자, 투자자에게 돌아가게 하려면 필요한 것이 있다고 이 기고는 짚었다. 건전한 경쟁이 그것이다. 소수의 사업자만 혜택을 보는 폐쇄형 생태계(walled gardens)가 등장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를 위해 중앙은행들은 공통 표준과 네트워크 상호운용성을 촉진하고 있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19세기 후반부터 대략 2% 수준에서 크게 낮아지지 않았던 금융중개 비용이 마침내 하락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다시 2008년의 그 선언문으로 돌아가보자고 기고는 제시했다.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고, 정부나 공공기관 또는 신뢰할 수 있는 중개기관 없이도 금융이 작동하는 세상을 초기 가상화폐 운동은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형성되고 있는 금융 시스템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디지털 금융의 역사는 흔히, ‘공공화폐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로 묘사된다. 하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디지털 금융이 추구해온 것은, 공공화폐를 더 나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코노미스트의 이 기고는 강조했다.

한편, 한국은행은 2023년부터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기관용 디지털화폐와 은행의 예금토큰을 결합한 디지털화폐 네트워크를 실험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범용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대신 기관용 디지털화폐를 기반으로, 은행의 예금토큰 등 다양한 민간 디지털통화를 연결하는 구조를 시험하고 있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