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의 민원처리 방식이 바뀌고 있다. 은행 창구나 콜센터에 접수된 고객 민원을 담당 직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관련 규정과 과거 사례를 찾아 답변서를 작성하던 방식은 옛일이 되고 있다.
2일 금융권에 따르면, 인공지능(AI)이 고객의 음성이나 메시지를 분석해 민원의 핵심 쟁점을 찾아내고 있다. 어떤 유형의 민원인지 분류한 뒤, 관련 규정과 유사 사례를 찾아 답변 초안까지 만들어주는 시스템이 금융권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단순 민원 하나를 처리하는 데도 담당자가 상담 내용을 확인하고 관련 상품 약관과 내부 규정을 검색한 뒤 유사 사례를 찾아 답변서를 작성해야 했다. 민원이 복잡할 경우, 관련 부서와 법무 검토까지 거치면서 처리 기간이 길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을 AI가 먼저 처리하고 사람은 AI가 만든 결과를 검증하고 최종 판단하는 방식으로 업무 구조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금융감독원도 민원·분쟁 처리의 AI 전환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금감원은 2026년 9월부터 권역별 민원·분쟁 담당 부서에서 AI 서비스를 시범 운영하고 있으며, 2027년 1월에는 AI 기반 금융민원·분쟁 종합포털을 본격 가동할 예정이다.
이 시스템에서는 AI가 접수된 민원을 유형별로 분류하고, 과거 유사 사례와 판례 등을 찾아 담당자에게 추천한다. 회신문 초안도 AI가 작성한다. 다만 최종 회신문은 담당 직원이 검토·작성하도록 해 AI가 잘못된 정보를 생성하는 이른바 ‘환각’이나 판단 오류가 실제 소비자 피해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구조다.
금감원이 AI 민원 시스템을 서두르는 배경에는 민원 처리량 증가와 장기화가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2025년 금융민원은 12만8419건으로 전년보다 10.4% 늘었다. 같은 기간 처리 건수도 12만7809건으로 17.0% 증가했지만, 평균 처리 기간은 46.6일로 오히려 5.1일 연장됐다.
보험 분야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2025년 보험민원은 6만2937건으로 전체 금융민원의 약 49%를 차지했다. 평균 처리 기간은 56.2일로 전체 금융민원 평균보다 길었다. 올해부터는 일부 비분쟁성 보험민원을 생명·손해보험협회가 맡고 금감원은 보험약관이나 불법·불건전 영업행위 등 분쟁성 민원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업무 분담도 바뀌었다.
은행들도 민원 AI를 서둘러 도입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차세대 AI 민원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고객이 남긴 텍스트나 음성 민원을 AI가 분석해 민원 유형을 파악하고 담당자가 활용할 수 있는 답변 초안을 만드는 방식이다. 여신 관련 복잡한 문의에 대응하기 위해 내부 직원용 AI도 활용하고 있다. 앞으로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에서 비슷한 불만이 반복될 경우 AI가 이를 탐지해 관련 부서에 경고하는 ‘민원 조기경보’ 기능으로도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케이비(KB)국민은행 역시 생성형 AI를 고객 상담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 2025년에는 직원들이 고객 상담 과정에서 은행 업무 규정과 지침, 상품 내용 등을 생성형 AI로 검색할 수 있는 상담 챗봇을 도입했다. 단순히 고객 질문에 답하는 것을 넘어 직원이 민원이나 복잡한 상담을 처리할 때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게 찾아주는 ‘상담 지원 AI’로 역할이 확대되는 모습이다.
신한은행도 민원 원문을 AI가 분석해 적절한 답변을 작성하고 과거 유사 회신문을 추천하는 방식의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민원 분류뿐 아니라 조사와 회신 등 민원 처리 전 과정으로 AI 적용 범위를 넓히는 움직임이다. 엔에이치(NH)농협은행도 민원 접수부터 분석·분류, 유사 사례 검색, 회신문 작성까지 전 과정을 AI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보험사에서는 이미 민원 녹취 자체를 AI가 분석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KB손해보험은 생성형 AI 기반 ‘AI 민원 해결 도우미’를 도입했다. 콜센터에 접수된 녹취 데이터를 AI가 분석해 민원 유형을 자동 분류하고, 유형별 처리 방법과 담당 부서 정보를 실시간으로 담당자에게 제공한다. 현장에서 입력된 피드백을 AI 학습에 반영해 정확도를 지속적으로 높이는 구조다.
KB손보는 앞으로 관련 법규와 근거까지 함께 제시하는 ‘원스톱 민원 처리 서비스’로 이 시스템을 고도화할 계획이다. 민원 담당자가 녹취를 다시 듣고 관련 규정과 담당 부서를 일일이 찾는 시간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민원 AI와 고객센터 AI의 경계도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케이티(KT)가 올해 8월 NH농협은행에 구축한 약 400억원 규모의 차세대 AI 컨택센터(AICC)가 대표적이다. AI 콜봇이 상담사 연결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업무가 기존 45개에서 180개로 늘었다. 음성인식 정확도도 약 90%에서 97% 수준으로 높아졌고 고객 대기시간과 상담 처리시간은 약 20% 단축됐다.
특히 AI 콜봇이 은행의 핵심 업무 시스템과 연결되면서 단순 안내를 넘어 고객·계좌 정보 조회와 실제 업무 처리까지 가능해졌다. 이는 금융권 AI가 ‘질문에 답하는 챗봇’에서 ‘업무를 직접 수행하는 AI 에이전트’로 진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금융권이 민원 AI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한 인건비 절감에만 있지 않다. 민원 데이터에는 금융소비자가 실제로 불편을 느끼는 지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AI가 수십만 건의 상담과 민원을 분석하면 특정 상품의 반복적인 오류, 특정 지점에서 발생하는 불만, 특정 시기에 급증하는 민원 등을 조기에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일한 대출 상품에서 중도상환수수료에 대한 불만이 반복되거나 특정 모바일 서비스에서 비슷한 오류가 집중적으로 발생한다면 AI가 이를 조기에 탐지해 관련 부서에 알려줄 수 있다. 민원을 ‘처리해야 할 비용’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한 데이터’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AI가 금융 민원의 만능 해결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성형 AI가 일반인들의 민원 작성 능력을 높이면서 금융회사와 금융당국의 업무 부담이 커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2026년 1분기 국내 보험사 39곳에 접수된 민원은 1만5996건으로 전년 동기보다 19.3% 증가했다. 특히 AI를 활용해 민원 내용을 길게 작성하거나 법률적 주장을 덧붙이는 사례가 늘면서 일부 보험사에서는 건당 처리 시간이 기존보다 최소 1.5배 늘었다는 현장 지적도 나왔다.
AI가 실제 존재하지 않는 판례나 잘못된 법률 정보를 만들어내는 ‘환각’도 문제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고객이 제출한 내용이 AI가 작성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검토를 생략할 수 없다. 결국 AI가 민원 작성을 쉽게 만든 만큼 금융회사와 당국은 그 내용을 다시 검증해야 한다.
따라서 금융권 민원 AI의 핵심 경쟁력은 ‘얼마나 많이 자동화했느냐’보다 ‘얼마나 정확하게 자동화했느냐’가 될 전망이다. 단순 조회·안내·반복 민원은 AI가 빠르게 처리하되, 보험금 지급 분쟁이나 금융사기 피해, 상속·신탁 분쟁, 불완전판매처럼 사실관계와 법률적 판단이 복잡한 사안은 사람에게 넘기는 방식이 필요하다. AI가 민원을 분류하고 자료를 찾아주는 단계까지 담당하고, 최종 판단과 책임은 사람이 지는 ‘휴먼 인 더 루프’ 구조가 금융권 민원 처리의 기본 모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금융권의 민원 AI 전환은 결국 ‘속도 경쟁’에서 ‘신뢰 경쟁’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AI가 몇 초 만에 답변 초안을 만들어도 그 답변이 약관과 법규에 맞는지, 고객의 실제 상황을 제대로 반영했는지, 비슷한 사례의 소비자에게 일관된 기준을 적용했는지를 사람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도 AI 민원 시스템은 단순한 콜센터 자동화 프로젝트가 아니다. 고객 불만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반복되는 문제를 상품·서비스 개선으로 연결하는 전사적인 소비자보호 시스템으로 발전할 수 있다.
‘며칠 걸리던 민원을 몇 시간으로 줄이는 것’이 1단계라면, 다음 단계는 ‘민원이 폭증하기 전에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금융권의 민원 AI 경쟁이 상담 자동화에서 민원 예측과 조기경보, 상품·서비스 개선으로 이동하고 있는 이유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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