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은행 이익의 상당 부분은 고객의 정보 비대칭과 나태함(수동적 예금)에서 나왔다. 계좌에 돈을 넣어두고 금리가 얼마인지 따져보지 않는 고객은, 은행 입장에서 가장 반가운 고객이다. 은행은 이들에게 사실상 이자가 없는 금리를 지급하면서, 확보한 자금을 대출이나 다른 자산에 운용해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AI)이 고객을 대신해 더 높은 금리의 상품을 찾아주고, 여유자금까지 자동으로 옮겨주는 시대가 오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메타의 AI 비서 ‘뮤즈(Muse)’ 같은 서비스는 은행 업무를 자동화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 고객을 대신해 은행과 금리를 협상하고 돈을 이동시키는 금융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다.
고객이 금융상품을 일일이 비교하고 계좌를 옮기는 번거로움이 사라지면서, 은행의 오랜 수익 기반인 저원가 예금이 경쟁의 중심에 놓이게 됐다. 에이전틱 AI는 ‘금리 최적화’라는 단일 목표로 고객의 동의와 적절한 권한 아래 예금을 움직이기 때문에, 은행의 거액 손실이 불가피하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최근 AI 에이전트의 확산으로 미국 은행들이 잃을 수 있는 핵심예금의 경제적 가치가 약 5000억달러(약 666조 2500억 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이는 미국 상장 은행 전체 시가총액의 약 10%에 해당하는 규모다.
“고객이 무관심할수록, 은행은 더 많은 돈 벌어”
은행업에는 하나의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고 FT는 짚었다. 고객이 자신의 돈에 신경을 덜 쓸수록 은행은 더 많은 수익을 올린다는 것. 은행은 고객들이 은행 계좌에 넣어둔 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돈을 활용해 상당한 이익을 얻는다. 고객에게는 낮은 금리를 지급하면서, 그 돈을 더 높은 금리로 운용하거나 대출해 수익을 올리는 방식이다.
FT에 따르면, 요즘 금융업계의 화두인 ‘에이전틱 AI’는 이러한 안락한 수익 구조를 뒤흔들 가능성이 있다. 물론 AI가 등장한다고 은행의 지위가 곧바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은행이 잃을 수 있는 이익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것.
핵심은 AI 비서가 고객을 대신해 더 나은 금융상품을 찾아주고,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점이다. 고객이 별다른 용도 없이 보유하고 있는 수조 달러(수천 조원) 규모의 ‘잠자는 돈(lazy money)’을, 예컨대 메타의 뮤즈 같은 서비스가 더욱 생산적으로 활용하도록 도울 수 있다.
가장 간단한 방식은, 고객의 계좌에 남아 있는 여유자금에 대해 더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상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FT는 설명했다. 더 나아가면, AI가 고객의 별도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계좌에 남아 있는 초과 자금을 자동으로 머니마켓펀드(MMF)에 옮길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현재 수시입출금 예금에서 받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 금리보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은행이 고객에게 금리를 더 지급하면 수익은 얼마나 줄까?”
이는 은행의 사업 방식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FT는 진단했다. 은행은 고객에게 지급하는 예금금리와 대출에서 받는 금리의 차이, 즉 예대금리차를 통해 전체 수익의 약 2/3를 벌어들인다.
미국의 대형 은행인 △제이피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는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예금 약 1조6000억 달러(약 2132조 1600억 원)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이들 은행 전체 부채의 약 16%에 해당한다.
만약 은행들이, 이 예금에 연 3%의 금리를 지급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FT에 따르면, 은행들이 부담해야 할 추가 비용은 연간 약 470억 달러(약 62조 6369억 원)에 달한다. 세 은행의 연간 합산 순이익과 비교하면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다.
지금까지 은행은 값싼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고객들이 계좌에 돈을 넣어두고도, 금리를 적극적으로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I가 고객을 대신해 더 나은 금리를 찾아주고 자금을 옮겨준다면? 은행은 과거처럼 낮은 비용으로 예금을 확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렇다고 은행 이익이 그만큼 사라지나?”
그렇다면 은행의 이익이 정말 이 정도로 증발할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FT는 진단했다.
일부에서는 AI가 촉발하는 대규모 예금 이동을 ‘에이전틱 뱅크런(agentic bank run·AI 에이전트가 유발하는 예금 대탈출)’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고객의 돈이 이곳저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막는 여러 현실적 제약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
가장 기본적인 장벽은 신뢰다. 고객들은 금융 서비스에 대한 통제권을 과연 어디까지 AI에 넘길 것인가. 특히 빠른 혁신을 추구하면서도 부작용을 감수하는 이른바 ‘빠르게 움직이고 기존 질서를 깨뜨린다(move fast and break things)’는 접근 방식으로 알려진 기술기업에 자신의 금융자산을 맡기려 할까?
AI가 고객의 지시를 잘못 해석해 엉뚱한 계좌로 돈을 보낸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AI가 예금 이동을 촉진하더라도, 그 속도와 범위를 제한할 수 있다.
“미국 은행이 잃을 수 있는 기업가치는 5000억 달러”
그렇다고 AI가 고객을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만드는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은행이 입을 수 있는 손실을 대략 추산할 방법도 있다고 FT는 밝혔다.
미국에서는 은행이 다른 은행을 인수할 때, 인수 대상 은행이 보유한 안정적이고 조달 비용이 낮은 예금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이 예금 덕분에 시장에서 별도로 자금을 조달할 때보다 얼마나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계산하는 것이다.
이를 핵심예금 무형자산(CDI·Core Deposit Intangible)이라고 한다. 금융자문사 머서캐피털(Mercer Capital)의 분석에 따르면, 이 자산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관련 예금 잔액의 약 2~3%에 해당한다.
FT는 이 비율을 미국 전체 은행에 적용해 봤다. 미국 은행권의 총예금은 약 20조 달러(약 2경 6658조 원)이며, 이 가운데 약 80%가 핵심예금으로 분류된다. 이를 토대로 계산하면, 약 5000억 달러라는 금액이 나온다는 것.
다시 말해 미국의 핵심예금이 모두 시장금리에 준하는 수익을 고객에게 제공하게 된다면, 은행들이 잃을 수 있는 자기자본가치는 약 5000억 달러라는 뜻이다. 이는 에스앤피(S&P) 캐피털 아이큐(IQ)의 자료를 토대로 추산한 미국 상장 은행 전체 시가총액의 약 1/10에 해당한다.
다만 이 수치는 AI 도입으로 은행이 실제로 5000억 달러의 손실을 입는다는 예측은 아니라고 FT는 조심스러워했다. 낮은 조달 비용을 제공해 온 핵심예금의 경제적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거친 추정치라는 것. 모든 예금이 시장금리를 받게 된다는 가정 자체도 상당히 강하다.
“은행도 AI를 통해 이익 얻어”
물론 은행은 AI 때문에 손실만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AI를 활용해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AI를 이용해 △비용을 절감하고, △대출금리를 보다 정교하게 책정하며, △값비싼 인적 오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티그룹에서 발생했던 9억 달러(약 1조 1988억 9000만 원) 규모의 송금 오류와 같은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면, 은행은 큰 비용을 아낄 수 있다. 브라이언 모이니핸 뱅크오브아메리카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자사가 AI 개선에 4억 달러(약 5327억 6000만 원)를 투자해 8억 달러(약 1조 655억 2000만 원)의 효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AI 에이전트가 금융 서비스 전반으로 확산되면, 자동화와 업무 효율화의 성과가 은행 주주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예금자에게도 점점 더 많이 돌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은행이 AI를 활용해 업무 처리 비용을 낮추면, 고객 유치를 위해 예금금리를 높이거나 각종 수수료를 낮출 여력이 생길 수 있다. 대출 심사와 위험 평가가 개선되면, 대출 조건도 더욱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다.
결국 AI는 은행의 수익 기반을 잠식하는 동시에, 은행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고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것.
“지금 은행 투자자들이 더 걱정하는 것은 금리인상”
현재 은행들이 걱정해야 할 더 큰 위험은 따로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금융회사 트루이스트가 지난 9월 말 실시한 투자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은행 투자자의 절반 이상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을 은행 가치평가의 가장 큰 위험으로 꼽았다. AI 봇이 초래할 위협을 지목한 투자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제이피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CEO도 반복해서 경고해 왔다. 은행 시스템은 1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본격적인 신용경색과 대규모 신용위축을 경험하지 않았다. 따라서 언젠가는 심각한 신용위기가 다시 찾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
“AI 에이전트가 은행업의 경쟁 질서를 바꿀 가능성은 분명하다. 하지만 은행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진짜 요인들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고 FT는 강조했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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