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여당 금융 권력, 은행에서 가상화폐로 이동 중”

이코노미스트, “스테이블코인은 ‘사실상 이자’ 지급…서클·리플 등은 은행업 진출”

가상화폐 산업이 미국 금융질서의 핵심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와 정치적 영향력 확대 때문. 

반면, 은행은 규제 완화의 수혜를 보면서도, 미국 공화당 내의 정치적 위상이 밀리며 구조적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밝혔다. 미국 보수진영에서 월스트리트가 누려온 특권적 지위를 코인산업이 대체하고 있다는 것. 은행의 진짜 위기는 규제가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의 상실이다.

특히, 스테이블 코인은 ‘은행 없는 예금’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스테이블코인의 ‘보상’ 지급은 사실상의 이자로, 은행 예금과 직접 경쟁관계에 있다. 리플 등 가상화폐 기업의 전국 단위 신탁은행 인가는, 전통 은행의 독점 영역을 더욱 흔들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가상화폐 업계에서 널리 회자되는 좌우명은 이렇다. “처음에는 당신을 무시하고, 그다음엔 비웃고, 그다음엔 싸우다가, 결국 당신이 이긴다”는 것. 

이 문구는 흔히 마하트마 간디의 말로 인용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한 말은 아니다. 가상화폐 업계의 디지털 개척자들은 거만한 태도의 월가 엘리트들로부터 오랫동안 조롱, 멸시를 견뎌왔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은행가들과 디지털 자산 업계 모두에게 올해는 풍년이었다. 가상화폐 산업은 지난 7월 통과된 ‘지니어스 법(GENIUS Act)’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법적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세를 확장했다. 은행들은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승리 이후, 규제 완화에 대한 기대 속에 주식이 34%나 상승했다. 개인적으로는 트럼프를 달가워하지 않는 은행가들조차,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의 규제 기조를 더 선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舊) 금융과 신(新) 금융 간의 긴장은 커지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가상화폐가 은행에 가하는 위협이, 과거 은행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미국 은행들은 공화당 내에서 ‘금융귀족’으로 특권적 지위를 누려왔다. 규제 완화의 수혜를 입게 됐지만, 은행들의 지위는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해 보인다. 이 자리를 가상화폐 신흥 세력과 나눠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장기적인 위협이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은행들이 당장 가장 우려하는 것은 스테이블코인 규제다. 지니어스 법은 스테이블코인의 보유자에 대한 이자 지급을 금지했다. 이는 예금 수요가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동해, 은행의 대출 여력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허점이 있다. 유에스디씨(USDC)를 발행하는 서클 같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코인베이스 같은 거래소와 수익을 공유할 수 있다. 거래소는 이를 다시 스테이블코인 구매자에게 ‘보상(rewards)’ 형태로 지급할 수 있다. 은행들은 이 같은 편법을 막아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수익률만이 아니다. 다른 영역에서도 가상화폐는 ‘벨벳 로프’ 즉, 은행만 출입할 수 있던 특권적 영역 아래로 파고들고 있다. 

지난 10월, 미 연준 이사이자 차기 의장 후보로 거론되는 크리스토퍼 월러는 “더 많은 기업이 중앙은행 결제망에 접근할 수 있게 될 수 있다”고 언급해 은행가들을 긴장시켰다. 이후 그는 해당 발언을 철회하며, 연준 계좌를 보유하려면 여전히 은행 인가가 필요하다고 해명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12월 12일 발생했다. 미국 은행 규제 당국이, 서클과 리플을 포함한 다섯 개 디지털 금융 기업에 대해 ‘전국 단위 신탁은행(national bank-trust)’ 인가를 승인한 것이다. 이 인가는 예금 수취나 대출을 허용하지는 않지만, 주(州)별 인가에 의존하지 않고 전국 단위로 자산 커스터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해준다. 은행들은 가상화폐 기업에 대한 인가 승인을 반대하며 규제 당국을 압박해왔다.

△미 연준 이사의 발언 하나, △은행 인가 하나,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의 규제 우회를 개별적으로 보면, 모두 사소한 사건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종합해 보면, 전통 은행에 대한 위협은 결코 작지 않다. 

은행들은 이미 사모대출(private credit)과 은행권 밖의 첨단 시장조성자들로 인해, △대출과 △거래 중개라는 핵심 역할을 잠식당해왔다. 또다시 밀려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기 어렵다.

은행이 누려온 특혜가 경쟁을 왜곡한다고 가상화폐 기업들은 주장한다. 이 일반론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에서 ‘이자’를 금지한 규정을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우회하는 행위는 노골적인 규칙 회피다. 불과 몇 달 전 이자 지급을 금지한 입법자들이 이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은행들이 직면한 진짜 문제를 보여준다. 정치적 영향력의 급격한 약화다.

은행은 미국 공화당 내에서 가장 중요한 금융 이해집단이 더 이상은 아니다. 그 자리는 이제 반엘리트·반주류 성향이 강한 ‘새로운 미국 우파’ 정치 속에서 뿌리를 내린 가상화폐 산업이 차지하고 있다. 

가상화폐 업계의 최대 정치행동위원회(PAC)들은 2026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수억 달러(한화 수천억원)의 자금을 쌓아두고 있다. 은행과 신흥 세력의 이해가 충돌할 경우, 결과가 은행에 유리하게 나올 것이라고는 더 이상 장담할 수 없다.

은행가들은 과거 바이든 행정부의 강한 규제에 불만을 품어왔다. 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테이블코인의 위장 이자 지급 문제와 자금세탁 위험을 우려하는 민주당 상원의원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가상화폐 기업의 은행 인가에 반대하는 과정에서는, 미국의 대형 은행들이 노동조합과 중도좌파 싱크탱크와 같은 편에 서게 됐다. 

간디가 역시 하지 않은 말이 하나 더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덧붙였다. “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것.

권세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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