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가 과거의 성공으로 오히려 발목을 잡혔다.”
‘매그니피센트 7’중 상당수 기업들이 ‘중년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1997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가 제시했던 ‘혁신가의 딜레마(Innovator’s Dilemma)’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애플, 구글, 테슬라 등 초대형 기업들을 집단적으로 덮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 저널(WSJ)이 “중년의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실리콘밸리의 왕들에게 조차 예외는 아니다”라면서 “한때 ‘혁신의 상징’으로 산업을 뒤흔들던 빅테크들이, 이제는 AI라는 새로운 파괴자 앞에서 위기를 느끼고 있다”고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매그니피센트 7’이라 불리는 미국 주요 기술 대기업 대부분, 혹은 전부가 AI로 인한 위협을 파악하려 애쓰는 동시에 자신들의 영역이 무너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최근 몇 주 사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애플 고위 임원에 따르면, 사파리를 통해 구글 검색을 사용하는 트래픽이 최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이에 따라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의 주가는 하루 만에 7% 이상 폭락했다. 애플 최고경영자(CEO)인 팀 쿡은 자사의 AI 기능 도입 지연에 대해, 투자자들에게 인내심을 호소하며 시간을 벌고 있다.
메타(Meta) 공동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이 회사의 광고 중심 비즈니스에 AI를 접목해, 외로운 사람들의 ‘AI 친구’ 역할을 하려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 역시 최근 트럼프정부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테슬라로 복귀했다. 자율주행 차량 도입 계획을 내세워 하락 중인 테슬라 주가를 되살리려 하고 있다. 그는 최근 애널리스트들에게 “우리는 죽음의 문턱에 있지 않다. 전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마치 영화에서 죽은 시체 더미에 던져질 위기의 인물이 “나 아직 안 죽었어… 나 괜찮아!”라고 외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WSJ는 해석했다.
물론 아직 이들 기업은 죽지 않았다. 이들은 미국 기업의 중심축이자 7조 달러(약 9826조 6000억 원) 규모의 시장 가치를 자랑하는 초우량 기업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마주한 기로는 크리스텐슨의 고전 ‘혁신가의 딜레마’의 21세기 판 사례로 딱 들어맞아 보인다. 이 책은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어떻게 기존 시장을 파괴하며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지를 설명했다. ‘디스럽션(Disruption·파괴적 혁신)’이라는 개념을 경영진 사이에서 유행시킨 것도 이 책이다. 이론의 핵심은, 잘나가는 대기업도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다가 새로운 기술과 유연성을 지닌 스타트업에 도태될 수 있다는 것. 넷플릭스와 블록버스터가 대표적 사례다. 닷컴 버블 당시에도 이 책은 실리콘밸리의 급부상을 설명하는 데 자주 인용됐다. 지금 상황과도 유사한 점이 많다.
AI는 인터넷처럼 광범위한 가능성을 지닌 기술. 그러나 지금은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AI를 주도할지 불확실한 초기 단계다. 예컨대 펫츠닷컴(Pets.com)처럼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실패한 사례도 존재했다. 심지어 크리스텐슨 본인도 아이폰의 성공을 예측하지 못했다. 2007년 출시 당시 그는 아이폰을 위협적인 기술로 보지 않았지만, 이는 모바일 컴퓨팅과 앱 경제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제는 AI 에이전트가 앱스토어의 패러다임을 흔들 수 있다. 현재까지 애플의 AI 대응은 주로 ‘과장’에 가까워 보인다. 쿡은 “우리가 요구하는 품질 수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변명했다. 구글은 그나마 제미나이(Gemini)라는 AI 챗봇을 내놓았지만, 그것이 회사의 핵심 수익원인 광고사업을 지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용자가 검색 대신 챗봇에게 질문하는 시대에, 클릭 기반 광고는 한계를 맞을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아직까지 어느 플랫폼도 확실한 승자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젊은 벤처투자자들에게 기회를 의미한다.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은 차세대 AI 유니콘을 찾아 나서며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이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스타트업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들 대기업이 위험한 혁신에 창의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구글의 제미나이에 오픈AI가 한발 앞섰다고 느낀다.
때로는 파괴적이라고 여겨지는 혁신이 기존 사업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업무용 제품에 AI를 성공적으로 접목, 애플을 제치고 시가총액 1위를 탈환했다. 엔비디아 역시 AI 붐 덕분에 고가의 칩 수요가 폭증하며 큰 수혜를 입었다.
하지만 저렴한 컴퓨팅 자원을 사용하는 중국의 딥시크(DeepSeek) 등 새로운 AI 모델들이 등장하면서 기술 가치의 중심이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된다. 분명한 것은, 아직 누구도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