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권위주의’와 ‘국가적 기술혁신’은 양립할 수 있을까? “러시아의 최근 인공지능(AI)산업은 이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엄격한 검열과 억압’ 등 정치적 통제는, ‘창의성과 인재’를 기반으로 하는 첨단 기술 혁신과는 근본적으로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FT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칩워(Chip War)’의 저자 크리스 밀러의 기고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특히 크렘린의 억압적인 정책과 전쟁은 러시아 인재들의 ‘두뇌 유출’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FT는 “AI 경쟁에서 러시아는 어디에 있는가?”부터 물었다. 미국과 중국은 AI 분야의 패권(supremacy)을 열망한다.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는 AI 허브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수조원)를 투자하고 있다. 한국부터 카자흐스탄까지 여러 정부는 ‘소버린 AI’ 프로그램 전략을 발표했다.
FT에 따르면, 러시아는 부러워할 만한 엔지니어링 인재의 역사를 자랑한다. 검색 엔진인 얀덱스(Yandex)부터 소셜 미디어 사이트 프콘탁테 (VKontakte)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시대 기술 기업의 자체적인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다. 텔레그램(Telegram) 메신저 서비스는 러시아 사업가 파벨 두로프가 만들었다. 러시아의 범죄 기업가들은 랜섬웨어와 가상화폐 강탈 분야에서 혁신가였다.
2017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AI를 선도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글로벌 AI 붐이 일어난 지 3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는 이 분야에 존재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FT는 꼬집었다.
이는 러시아에게 AI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우크라이나와의 드론 전쟁은 점점 더 자율화되는 시스템에 의존한다. 전면 침공 초기에 염원했던 AI 기반의 ‘드론 떼 전술’은 이제 현실화 직전에 놓여 있다. 러시아는 AI 기반 드론에 사용하기 위해 하이엔드 그래픽처리장치(GPU) 프로세서를 포함한 수천 개의 칩을 밀수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AI 분야에서 여전히 미미한 존재로 남아 있다.
국경 바로 건너편 핀란드에서는, 러시아 기술의 또 다른 역사가 운영되고 있다고 FT는 설명했다. 이곳의 대형 데이터센터 캠퍼스는 엔비디아의 최신 칩 일부를 포함, 6만 개의 GPU 수용을 목표로 한다.
이 데이터센터는 원래 얀덱스가 소유했다. 현재는 네비우스가 운영하고 있다. 네비우스는 최근 미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기 위해 174억 달러(약 24조 4313.4억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네비우스는 이후, 데이터센터 스타트업계의 거물로 급부상했다. 코어위브 같은 유사 클라우드(neocloud) 경쟁사들 대부분은 가상화폐 채굴 배경이 있어, AI로 신속하게 전환할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네비우스의 배경은 다르다. 이 회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난민이다.
2022년 2월 이전에도 크렘린궁은, 반대파를 진압하기 위해 기술 기업들을 압박했다. 얀덱스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를 필터링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얀덱스는 러시아 기술의 가장 위대한 성공 사례였다. 기업가들이 석유 및 가스 분야 외에서 돈 벌 방법을 보여주는 모범 케이스였다. 얀덱스를 너무 심하게 압박하면 기술 발전 노력이 약화될 것임을 크렘린궁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균형 잡기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무너졌다고 FT는 지적했다. 러시아의 모든 기술 기업과 마찬가지로, 얀덱스는 검열을 강화했다. 공동 창업자인 아르카디 볼로즈를 포함한 일부 경영진은 서방의 제재를 받았다. 다른 직원들은 크렘린궁 선전에 대한 회사의 공모를 비난하고, 해외로 도피했다. 부분적으로는 항의의 의미로 부분적으로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얀덱스는 회사를 둘로 쪼개는 것으로 대응했다. 네덜란드에 상장된 얀덱스는 표면적으로 유럽 기업이었다. 2024년 초, 회사는 사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러시아 자산을 크렘린궁과 연관된 투자자들에게 헐값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남은 비(非)러시아 자산은, 네비우스로 브랜드가 변경됐다.
2023년에 공개적으로 전쟁을 규탄했던 볼로즈는, 그 다음 해에 유럽연합(EU)의 제재를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마이크로소프트와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시아로부터의 이 회사에 대한 이민은 완료됐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 보면, 이 검색 엔진은 여전히 러시아 기술 생태계의 중심에 남아 있다. 그러나 얀덱스는 세계 최대 기술 기업들과 거래를 맺는 대신, 군사화된 경제를 헤쳐나가고 있다. 가장 똑똑한 기술 기업가들은 떠나 보냈다.
얀덱스는 이제 외국 기업이 사라졌으므로, 러시아 시장을 독점하기는 더 쉬워졌다. 하지만 러시아 기술 기업이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희망은 소멸됐다.
러시아는 기술 인재를 수출해 온 오랜 역사가 있다. 항공 개척자인 이고르 시코르스키에서부터, 구글 공동 창립자 세르게이 브린까지다. AI가 주요 기술 변화를 약속하는 상황에서, 푸틴은 최악의 시기에 이러한 전통을 계속하기로 선택했다고 FT는 지적했다.
권세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