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 혁신의 주역’으로 주목받는 스테이블코인이, 실제 적용에는 한계가 많을 것이라는 진단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제이피모건(JPMorgan) 글로벌 마켓 전략팀의 최근 보고서를 인용, “스테이블코인의 시장규모는 2028년까지도 5000억 달러(약 687조 4500억 원)에 그칠 것”이라며 일부 투자은행들이 예측하는 1조~2조 달러(약 1375조 3000억 원~2750조 6000억 원) 규모로의 급성장 주장을 반박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론상 상당히 매력적이다. 국경을 초월한 즉시 송금이 가능하고, 거래 비용도 현재보다 훨씬 저렴할 수 있다. 스마트 계약은 에스크로(조건부 지급)에서 상대방의 리스크를 제거할 수 있어, 구독 서비스, 보험, 스포츠 베팅 등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모든 거래가 실시간으로 퍼블릭 블록체인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투명성도 뛰어나다.
FT에 따르면, 실제로 스테이블코인이 등장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가상화폐 거래 외의 영역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사례는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낙관적인 전망이 사라진 건 아니다. 최근 미국 스테이블코사인 서클(Circle)의 기업공개(IPO)를 주관한 세 증권사는 아주 큰 수치를 내놓았다.
이중, 골드만삭스는 스테이블코인의 시가총액이 현재의 2400억 달러(약 330조 960억 원)에서 3~5년 내에 1조 달러를 넘을 것으로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보고 있다고 전했다. 씨티그룹은 스테이블코인이 진출할 수 있는 시장 규모(TAM)를 ▲195조 달러(약 26경 8222조 5000억 원)에 달하는 국경 간 송금 시장과 ▲1경 달러(약 1375경 5000조 원)에 이르는 스위프트(SWIFT) 송금 흐름으로 추산했다. 제이피모건은 스테이블코인이 미국 광의통화(M2·현금+요구불예금+단기저축성예금) 통화공급량(22조 달러·약 3경 274조 2000억 원)의 10%를 차지하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제이피모건의 ‘글로벌 마켓 전략팀’은 좀 더 현실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현재 2400억 달러에서 1조~2조 달러까지 급성장할 것이란 전망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며 “우리는 2028년까지 5000억 달러로의 점진적인 확대를 예상한다”는 것.
이 회사 애널리스트 니콜라오스 파니기르초글루는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보다, 현실에 기반한 데이터를 보자”면서 “스테이블코인은, 물가 상승으로 인해 가치가 하락하는 ‘무이자 자산’이고 이를 보유할 유인은 적다”고 밝혔다. 대신 스테이블코인이 가상화폐 생태계 내의 ‘윤활유’ 역할을 얼마나 확장할 수 있을지를 보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그는 지적했다. 현재 스테이블코인 수요의 약 88%는 가상화폐 거래에 쓰인다.
FT에 따르면, 향후 분석은 추정의 영역이다. 예컨대 2024~2028년 사이 비트코인 반감기에 가상화폐 생태계는 두 배 성장할 수 있다. 이 경우 비트코인 가격은 약 14만 달러(약 1억 9269만 6000 원)에 이를 수 있다. 신흥국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와 함께, 달러화 예금에 대한 수요도 늘어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신흥국의 명목 GDP는 2028년까지 23% 증가할 전망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를 이용한 불법 활동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 성장 동력은 아니다. 가상화폐 규제 강화와 수사 효율성 향상은, 테더(Tether)나 서클 같은 주요 스테이블코인의 악용을 줄일 것이라고 FT는 예상했다. 물론 이상한 이름의 수많은 토큰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있다.
이론적으로는 블록체인 기반의 결제가 더 빠르고, 효율적이며, 상호운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가 법정화폐로 시작하고 끝난다. 이로 인해 ‘온/오프 램프’(가상화폐 ↔ 법정화폐 전환 시스템)가 필요하다. 이는 상당한 비용과 마찰을 발생시킨다.
이는 특히 핀테크 발전으로 기존 금융시스템의 결제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점과 비교하면 매력이 떨어진다. 제이피모건은 “향후 2~3년간 결제에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10배 늘어난다고 가정하더라도, 시장은 현재 150억 달러(약 20조 6280억 원)에서 1500억 달러(약 206조 2800억 원)로 늘어나는 데 그친다”라면서 “이는 결제 시스템 전반을 흔들기엔 부족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스테이블코인 낙관론자들은 중국 디지털 위안화(e-CNY)의 급성장을 예로 든다. 이는 2022년 말 136억 위안(약 2조 6083억 4400만 원)에서 3000억 위안(약 57조 5370억 원) 이상의 시가총액으로 크게 확대됐다. 이에대해 제이피모건은 다음처럼 반박한다.
첫째, 디지털 위안화는 중앙은행의 부채이며, 실제로는 지폐를 대체하는 성격이다. 목표는 본원통화량(M0·현금 유통량)의 10~15% 점유율로, 현재 기준 1조3000억~2조 위안(약 249조 3400억~383조 5600억 원) 규모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민간 발행의 토큰화된 무이자 머니마켓펀드(MMF)로, 민간 부채에 가깝다.
둘째, 디지털 위안화는 탈중앙화 블록체인을 사용하지 않는다. 중국인민은행(PBoC)이 감독하는 중앙 집중형 네트워크에서 운용된다. 이는 알리페이, 위챗페이와 직접 경쟁하는 구조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을 글로벌 알리페이·위챗페이로 보면 될까? 제이피모건의 대답은 ‘그건 아니다’라는 것.
중국에서 알리페이와 위챗페이 역시 민간 부채이지만, 중앙은행의 준비금이라는 공공 부채로 뒷받침된다. 은행 예금은 대출과 채권 등 다양한 자산으로 뒷받침되며 예금보호 제도도 있다. 알리페이의 성공은 블록체인이 아닌, 기존 금융시스템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핀테크 혁신의 결과다. 알리페이·위챗페이의 성공은 오히려 블록체인 기반 결제의 필요성을 줄여주는 셈이다.
물론 이런 비관론이 틀릴 수도 있다고 FT는 밝혔다. 요가 스승인 베라(혹은 닐스 보어)가 말했듯, “예측은 어렵다. 특히 미래에 대한 예측은 더더욱.”
FT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인 서클의 결제 네트워크는 지난 5월 첫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여전히 외환(FX) 변환과 최종 지급에는 기존 결제망을 사용한다. 가상화폐 기반 해외송금은 효율성을 확보하려면 더 많은 외환 유동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유동성이 어디서 나올지 불분명하다고 FT는 지적했다.
서클은 또한 글로벌 금융상품거래소 운영기업인 인터콘티넨탈 익스체인지(ICE)와 협력, 스테이블코인을 거래 담보로 활용하는 실험도 진행 중이다. 정산 기간 단축과 마진 요구 감소가 목적이다. 그러나 현재 스테이블코인 전체 시가총액은 미국 주식 시장 분기 거래량의 0.5%에도 미치지 않아, 파괴적 변화가 일어나려면 한참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와관련, 골드만삭스는 “거래소가 스테이블코인을 담보로 받아들이려면, 그 준비금에 대한 감사를 훨씬 자주 실시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FT에 따르면, 소매 결제 분야는 미국을 제외하면 어디서나 이미 빠르고 저렴하다. 시장은 클 수 있지만, 실제로 ‘혁신할 거리’는 많지 않다. 결국 제이피모건의 글로벌 마켓 전략팀은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이상적 전망이 아닌 현실 기반의 분석을 이같이 내놓았다고 FT는 평가했다. 다만 서클의 기업공개(IPO)를 맡았던 제이피모건의 또다른 팀(ECM)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던 듯하다고 봤다.
권세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