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의 공공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10%로 치솟은 사상 최고수준이다. 미국이 GDP 대비 6%의 적자를 보이는데 이어,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의 재정상태는 파탄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선진국이 인플레이션으로 몰락했던 아르헨티나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경고했다. 이들 국가의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처럼 인플레이션과 금융 억압을 통해, 부채의 실질 가치를 줄이는 가장 쉬운 탈출구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 한국 역시, 급격한 고령화, 복지 확대, 세수 둔화 속에 비슷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평가된다.
국방비 증가, 정치적 난제 등으로 인한 증세 및 긴축 실패로, 각국 정부는 분수에 넘치게 지출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발전에 따른 생산성 향상도 결국 복지 지출과 금리 상승을 유발, 부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실정이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현재 선진국 모두는 아르헨티나가 됐다. 각국 정부들은 자신들의 재정 여력을 훨씬 넘어서는 지출을 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그들 나라가 빠져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출구다. 각국은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의 시기를 맞고 있다.
지금 선진국 어디를 보더라도 정부 재정이 엉망이다. 프랑스는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베르사유 궁정 시대의 가발보다도 빨리 총리를 교체하고 있다. 10월 14일, 세바스티앙 르코르뉴 신임 총리는 재정 건전성을 되찾기 위해 추진 중하던 '연금 수령 연령 인상 계획'을 연기하겠다고 제안했다.
일본에서도 총리 후보들이 막대한 국가 부채에도 불구하고 추가 지출을 약속하고 있다. 영국은 복지 개혁이 사실상 폐기된 이후, 이미 대규모 세금 인상을 단행했음에도 또다시 구멍 난 재정을 메우기 위한 증세 압박에 직면해 있다.
그 모든 것 위에 미국의 ‘GDP 대비 6%’라는 감당 불가능한 재정 적자가 놓여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여기에 세금 감면을 더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과연 정부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무모한 지출을 계속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질문했다. 선진국의 공공부채는 이미 GDP의 110%에 달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공공부채 비율이 이렇게 높았던 적은 단 한번 뿐이었다. 바로, 나폴레옹 전쟁 직후. 그때 영국은 거의 한 세기 동안 긴축 재정을 지속해 채권자에게 빚을 갚았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인들은 예산 균형을 맞추는 데 고전하고 있다. 높아지는 이자 비용과 국방비는 피할 수 없다. 고령화로 인해 유권자들은 더 많은 현금 지원을 요구한다. 세금 인상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유럽은 이미 세율이 높다. 미국에선 증세가 정치적 자살 행위에 가깝다. 보통선거 시대 이후, 선진 7개국 중 허리띠를 졸라매 부채를 대폭 줄인 사례는, 테크노크라트 지배의 절정이던 1990년대 캐나다 한 번 뿐이다. 오늘날은 그런 기적을 기대하기 어렵다.
일부는 AI가 생산성을 끌어올려 재정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희망한다. 하지만, 이는 환상에 가깝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인구 증가나 ‘후발주자의 성장 효과’로 부채를 줄였기 때문. AI와 같은 기술 혁신은 이와 성격이 다르다. 소득이 오르면 연금과 의료비 지출도 함께 늘고, 이로 인해 금리도 상승한다.
AI가 경제성장을 폭발적으로 이끌 수 있다. 그렇더라도, 데이터센터와 반도체에 대한 투자비용이 더 커지면서 오히려 금리를 끌어올릴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빠른 성장으로 얻는 재정 여유는 늘어난 부채의 이자비용으로 상쇄될 것이다.
결국, 선진국의 정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와 마찬가지로, 인플레이션과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을 통해 부채의 실질 가치를 줄이려 할 가능성이 높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중앙은행들은 이미 국채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나 영국의 나이절 파라지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약화시켜 인플레이션 방어막을 무너뜨리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가 상승은 대중에게 인기가 없다. 불운했던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물어보라.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기 위해 정치적 지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1970년대나 2022년의 인플레이션 역시 아무도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 그래도 발생했다. 정부가 재정 통제를 잃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지속하면, 인플레이션은 그저 ‘저절로’ 일어난다. 시장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즈음엔 이미 늦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인플레이션이 경제와 사회에 어떤 피해를 주는지 성찰해야 한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제시했다. 인플레이션은 부를 불공정하게 재분배한다. 인플레이션으로 부는 이동한다. △채권자에서 채무자로, △현금·채권 보유자에서 부동산·실물자산 보유자로, △고정임금 계약자에서 인플레이션을 예측한 사람으로. 케인스가 말했듯 “임의적 부의 재편성(arbitrary rearrangement of riches)”이 일어난다.
△AI의 사무직 일자리 대체, △베이비붐 세대 부자들의 자녀 상속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점에서, 이런 추가적인 부의 재분배는 사회적 불만을 키울 것이다. 이 다층적 혼란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사회적 계약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
20세기 아르헨티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한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젊은 나라에서 중진국으로 추락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경쟁은 혁신이나 생산성이 아니었다. 누가 국가 권력을 장악해 인플레이션의 압박을 피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재정 제약을 무시한 채 재분배만을 좇는 사회의 미래다. 10년 전 이코노미스트는 브라질·인도 같은 신흥국들에게 ‘아르헨티나의 교훈’을 경고했다. 이제 그 경고는 선진국을 향한다.
그러나 이런 ‘하강 나선’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1970년대의 고물가는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같은 지도자를 낳았다. 그들은 ‘건전한 통화정책(sound money)’을 국가와 시민 간의 신뢰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 결과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긴축 재정의 원칙이 확립됐다. 그 체제 덕분에 신흥국의 인플레이션도 1990년대 이후 급격히 낮아졌다. 심지어 지금 위기에 빠진 아르헨티나조차,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아래에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선진국이 과연 파멸의 길을 갈 것인가 또는 건전한 길을 택할 것인가를 질문했다. 많은 나라에서 포퓰리스트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 재정 위기가 닥치면 그들이 비난받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다시 건전 재정으로 돌아갈 기회가 열릴 수도 있다. 반면, 현금 저축자와 채권자들은 인플레이션에 강력히 반대할 것이다. 이들 중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게 될지는, 정치가와 채권시장의 일련의 충돌로 드러날 수도 있다. 그 결과중 일부는 추할 수 있다.
세계가 과도한 부채의 위험을 깨닫고 부채를 줄이는 데 성공한다면, 새로운 재정 질서가 열릴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세계 주요 경제는 혼돈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것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전망했다.
권세인 기자